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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지난 3개월간의 기록 vol. 1

2020. 3. 21.

 

 

1. 새 직장으로 첫 출근하는 날.

9시까지 본원으로 출근하라고 해서 일부러 서둘러서
8시 20분쯤 도착해 옆의 커피빈에 있다가 들어갔다.

나는 지금까지 직장이 대부분 강남이었다.
대학원에 가기 전에 다닌 광고대행사도
한 때 광고대행사의 메카라 불리던 신사역이었고,
박물관도 그 근처였다(돈도 많으면서 왜 그곳에 지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지만 ㅎㅎ).

광화문에서 근무하고 싶었다.
직업을 선택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것,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장소로 출근할 것이었다.
그래야 어차피 뻔한 직장 생활에서 버티는 힘을 갖게 되고
그 가운데 소소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광화문으로 출근하면 퇴근하고 교보문고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을 그렇게 갖고 싶었다.
이번에도 광화문으로 출근하는 것은 아니게 되었지만
그 언저리까지 다가갔다는 점에 만족을 찾기로 했다.

최전방 연천에 있는 박물관에서 근무하는 후배에게
형은 어김없이 서울 중심으로 가냐며 부럽다는 말을 듣고
더욱 만족감을 갖기로 했다.

동생아~ 좀만 더 고생해라. ㅋㅋ

 

 

 

2.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자문

원래대로라면 3월 12일에 개막했을 한국 근현대 서예전의 자문을 했다.
자문이라고 하니 뭔가 거창하고 왠지 교수님이나 해야 할 것 같아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망설여졌지만,
그냥 내가 아는 한도에서 아이디어 공유를 한다 생각하고 참여했다.

나처럼 한국, 동양미술사를 전공한 사람은
굳이 시서화 일치 사상까지 가지 않더라도
서예는 당연히 미술 장르 중 하나라는 생각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사람들 중에
서예는 미술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이를 처음 접하고 '헛공부했구만'이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내가 대학원에 가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할지, 한국미술사를 할지를 놓고
한창 고민하던 시절, 지금의 지도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서양미술사를 하게 되더라도 한국미술사 공부를 게을리하지 마라"고 하셨었다.

아무리 본인 전공이 서양미술사다 하더라도
한국미술사에 대해 너무 모르는 이들이 너무 많다.
그래도 상관없으려면 길이 하나 있긴 하다.
한국을 떠나 살면 된다.

이번 전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 중에는
"왜 서예는 미술인가"도 담겨 있다.

사진은 국현 회의실에서 찍은건데 중요한 내용들이 많아서 블러처리를 했다.

 

 

 

3. 전시 준비

첫출근해보니 전시 준비가 막바지였다.


그것도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가장 큰 전시였다.
여기 시스템도 낯설고, 사람들 이름도 못외운 상태에서
전시 오픈 직전에 투입되어야하는 상황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조금 빡세도 전시 오픈하고 나면
다른 때보다 더 빨리 이 조직에 녹아들어 있겠다는 장점도 생각났다.

나는 전시의 일부분이 근대 호텔, 철도 관련 아카이브 섹션을 맡았다.
전시실 내에 있는 화장실 위치도 모른 상태에서 시작하느라 꽤 난감했지만,
'에이~ 그냥 하면 되지'라는 내 특유의 무덤덤함이 발동했다.

그래서 그냥 했다.

가만히 보니 기존에 있던 진열장은 쓰기 어려울 듯해서
물어보니 저~~기 일산 가는 길목에 있는 컨테이너에 다른 진열장들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트럭을 수배해서 진열장들을 가져왔다.

 

 

 

가져온 진열장들이다.
견고해보이지 않아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시간과 돈이 없었다.
보다 어서 새로 .
이번엔 어쩔 수 없지.

 

 

 

 

전시실 시공할 때 이 정도 규모는 처음 봤다.
아예 건물 자체를 새로 짓는 것 같았다.
내 전시였다면 이 돈 아껴서 더 좋은 작품들 구입하는데 썼겠지만,
기존 기획자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했겠지라는 생각과
이런 경우에 전시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까라는 호기심이 들었다.

나라면 겪어보지 못했을 사례를 하나 채운다는 생각으로 가만히 지켜봤다.


 

 

호텔들을 돌며 호텔의 사료들을 대여해왔다.
나름 자기들의 역사이기에 생각보다 사료들을 잘 보관하고 있었다.
그래도 학예사까지 갖춘 호텔은 많지 않아서
작품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대여하는 날, 원래 사료들의 상태가 어땠는지 체크하느라 바뻤다.
이 사진도 원래 이 정도 찢어져 있었다는 것을 증빙하기 위해 촬영해놓은 것이다.

근대 전공자라면 관심을 가질법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 많았다.

 

 

 

여기는 반얀트리호텔 로비이다.
스파, 헬스 클럽 중심의 호텔답게 호텔 로비의 컨셉이 다른 호텔들과 많이 다르다.
번잡한 서울 도심 속에서 여유롭게 쉬기 좋은 곳이었다.
장충단 근처에 있는 장소성도 한 몫했다.

 

 

 

워커힐 호텔에서 내려다 본 한강의 전경이다.
이번에 안 사실인데,
워커힐 호텔이 우리나라 공연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왔더라.
공연 무대 디자인도 선도적이었다.
수십 년 전에 제작한 무대 모형들과 공연 관련 여러 사료들을 빌려왔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19금 공연들이 많았는데
전시에 내보일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한국판 물랑루즈로 소개할 수 있었는데.. 아까비.

 

 

 

하루 종일 유물을 대여하고 다니느라 꽤 피곤했다.
이런 날은 역시 삼겹살에 소주지.

 

 

 

전시 오픈하고 이제 좀 여유있게 밀린 행정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팀의 홍보 담당자들을 보니 꽤 분주해 보였다.
회도 .

전시 오픈 직후에 늘상 봐오던 허무함과 몽롱한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니 며칠 후에 있을 포럼 준비 때문에 바쁘다고 했다.

알고 보니 우리 팀에서 디자인 관련 박물관 준비도 함께 하고 있었다.
요즘 박물관, 도서관 등에서 아카이브에 대한 관심이 높다.
예전에는 작품을 보완하는 자료로서 종속적인 위치였다면,
이제는 독립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중이다.

사진 등 여러가지 자료를 어떻게 바라보고, 정리하고,
가치를 부여해서 사람들에게 선보일까가 화두다.

이에 대한 포럼을 준비 중이라고 하길래
마침 아카이브, 특히 '라키비움(Library + Archive + Museum)' 개념에 관심이 있던 차라
현장 지원하겠다며 참석하기로 했다.

 

 

 

학회 형식으로 진행된 포럼을 간간히 진행상황에 맞춰 현장 업무를 도와주며 들었다.
해외 사례(홍콩)의 경우에는 일단 나는 홍콩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곳의 미술관 운영을 엿볼 수 있어 재밌게 들었다.

아카이브에 대한 관점, 디자인 분야의 생각 등을 알 수 있는 점도 좋았지만,
자신이 기획했던 전시 소개, 성과만 늘어놓는 발표자도 있어 '저 사람은 뭐하러 여길 나온거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그 전시 소개라는게 다른 지면에서도 익히 봐오던 내용의 반복이었다는 점이다.
쓸 수 있는 카드를 다 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고, 스스로도 경계하는 태도 중에 하나는
"왕년에 내가 뭐뭐했다"이다.

가끔씩 쓰면 도움이 되지만
남용하며 현재의 상황을 자주 비교, 불만하는 사람을 보면
'그럼 그냥 그 일 하지, 왜 여기와서 이러나'는 생각이 든다.

나도 이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나는 광고대행사에서 3년을 일하다가 미술사로 방향을 틀었다.
미술사 대학원에 들어온지 3년이 지난 후부터는
이제는 광고계에 있던 날들보다 미술사쪽으로 온 시간이 더 길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며
광고 일할 때의 이야기는 안하기로 마음 먹은 적이 있다.

큐레이터도 광고기획자와 마찬가지로
기획일 중의 하나이기에 일하면서 아예 없었던 일처럼 할 수는 없었지만
가능하면 옛날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포럼을 마치고 퇴근하면서 찍은 숭례문 야경.
카메라를 수동으로 촬영하는 재미에 빠진지 얼마 안되었는데
이 사진이 수동으로 촬영한 첫 야경사진이다.

후지 카메라 특유의 물 빠진 색감을 아주 좋아한다.

 

후지 XF10을 쓰고 있는데

후지 색감은 그대로 표현해주되 작아서 가지고 다니기도 좋고 가격도 저렴하다(56만원에 구매).

소위 가성비 좋은 카메라이니 후지 색감을 좋아한다면 추천해주고 싶다.

 

 

 

전시 오픈을 하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박물관에 있을 때의 습관대로
하루에 두 번씩은 꼭 전시실을 둘러본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 중 한 명인 '길종상가'의 설치 작품들이다.
최초의 서양식 레스토랑이었던 공간을 채워줬다.

 

 

 

 

근대 호텔과 경성 관련 아카이브를 엽서로 만들었다.
사진에 보이는 온실 같은 저 곳은 조선호텔의 '선룸'이다.
당시 사람들이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어하는 명소였다.

 

 

 

 

전시 오픈을 했을 때와 논문을 다 마친 직후가 가장 여유롭다.
오랜만에 크레마 사운드를 꺼내 출퇴근하며 전공과 관련없는 책을 읽는데
이 때가 가장 행복하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 자문을 하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기에 주말이나 저녁에 퇴근하고 가곤 했는데
지금 회사 규정을 보니 업무 관련된 회의, 강의는
신고하고 가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진짜 허용해주는건지, 형식적인 규정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주중 업무 시간 중에
외부 회의 신고서를 제출해봤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준비도 막바지라 자문 회의도 빨리 마치는게 좋아서
어차피 주중에 시간내는 것이 필요하기도 했고.

들어온지 얼마 안됐는데 허락해줄지,
들어온지 얼마 안된 사람이 이렇게 나가는 것에 대해
내부 구성원들의 반응은 어떨런지 함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결재도 빨랐고, 내부 구성원들도 '그런가보다~'하는 분위기였다.

나이스.

 

 

 

여유로운 날에는 교보문고를.

딱히 살 책이 없어도 이런 때는 가야지.
이 코너, 저 코너 돌아다니며 새로 나온 책들을 구경하다 보면
트렌드가 무엇인지 감이 올 때가 많다.

단순히 출판계의 트렌드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요즘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요즘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감이 온다.

 

사진 속 공간은 교보문고 내에 있는 갤러리다.
소규모 공간임에도 짜임새있는 전시를 할 때가 있어
가끔 들어가서 구경하다 나오곤 한다.

 

 

이 사진은 내가 먹을 때 촬영한 것은 아니고
조만간 가고 싶어 담아놓은 사진이다.
맛있겠다.

소주 한 잔을 입에 탁 털어놓고
두툼한 삼겹살 한 점을 먹고 오이고추에 쌈장을 찍어서 딱 먹으면!!
크아~

 

 

전시 공간에 프릳츠 커피가 입점했다.
시간대별 선착순으로 관람객들에게 커피를 나눠줬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
가끔 마셔봤는데 진한 커피를 좋아해서인지
내 입맛에도 잘 맞았다.

전시는 무엇보다 작품의 가치를 선사하는 데 집중해야지 이게 뭐하는거여...
라고 잠시 생각한 적도 있으나
체험형 전시라는 용어도 있는만큼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어느 한 쪽이 매몰되지 않도록 잘 하면 되지 머.

 

 

요즘은 확실히 복고주의 시대인듯.

8, 90년대 문화를 다들 좋아하네.
80년대를 살아보지 못한 요즘 20대들이 이렇게 소위 '레트로'한 것을 좋아하는걸 보면

단순히 '추억 소환'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합정도에 있는 일본 라멘집 <하카타 분코>
이름은 서점인데 라멘집이다.
일본 불매운동 분위기에 맞춰
일본 맥주를 판매하지 않는다는 글이 써있다.
더불어 '나눔의 집'에 기부도 한다니 나이스하네.

 

 

스산한 정초의 합정동 골목

 

 

<하카타 분코> 내부 모습.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었나?
SNS 둘러보다가 사진이 이뻐서 다운 받아놓은 것이다.
잭슨 폴록의 무아지경을 바라보며
저 연인은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별거 아닌 일상적인 대화였을지라도
그들에겐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호텔에서 트롤리를 빌려왔다.

 

 

전시 마감할 때의 서울역 풍경.
맞은 편의 옛 대우빌딩을 보면 드라마 <미생>의 감동이 밀려온다.
저기에 오차장과 장그래가 있을 것만 같다.

 

 

요즘 애용하고 있는 로이텀 노트.

종이질도 몰스킨보다 좋고,

사이즈도 몰스킨과 미묘하게 다른데(세로 길이가 조금 더 길다) 샤프한 맛이 있다.

페이지 번호가 적혀있는 것도 장점이다.

 

 

서울역 근처에 있는 <이이네(いいね)>라는 라멘집에 갔다.

 

회사 생활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것 중에 하나가

점심 시간에 나오면서 "오늘 뭐 먹을까요?"라고 묻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가 아닌 '끼니를 때운다'에 가까워서인지

메뉴 정하고 가서 음식을 기다리는 행복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예전부터 다음에 이직하는 곳에는 회사 식당이 있는 곳으로 가면 좋겠다는 말을

노래해왔는데 이번에 구내 식당이 있는 곳으로 왔다.

(정확하게는 다른 회사의 식당이지만 우리도 들어가서 먹을 수 있음)

 

암튼 사람은 역시 꿈을 꿔야한다. ㅎㅎ

 

덕분에 구내 식당에서 식사를 주로 하지만,

가끔씩 날씨 화창한 날, 술 마신 다음 날 등

어쩌다 다른 곳에 가면 그때는 정말 외식하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

 

 

30분 정도 기다렸다가 먹을 정도로 좁은 곳이었는데

요리 만드는 것을 구경하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요리사의 패턴화된 움직임, 푸짐한 식재료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시킨 규동 라멘.

 

나는 소고기보다 돼지고기를 좋아해서

덮밥도 소고기 덮밥인 규동보다는

부타동을 좋아하는데 신기한게 우리나라에는 부타동 파는 곳이 많지 않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들어와 전시실부터 둘러보러 왔다.

칵테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저 수영장도 호텔 수영장을 모티브로 한 설치작품인데

작품 해석을 더 보완해서 관람객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안하면 테마 파크와 다를 바가 없기에.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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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미술 - 빛의 길을 꿈꾸다>전을 보고 /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관)

2018. 12. 1.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관)에서 하고 있는 <대한제국의 미술 - 빛의 길을 꿈꾸다>전에 다녀왔다.


보통 전시를 가면 작품에만 집중해서 보는 편이다. 전시 디자인은 안타깝게도 '거기서 거기'라는 허무함을 갖고 있는 데다가 작품이 지닌 미적 가치가 전시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전시 역시 근대 명품들을 공부하러 간다는 생각으로 방문했다. 그런데 제1실부터 이 전시를 보는 관점을 달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 전시는 작품 선정 및 설명, 전시 디자인, 전시 구성이라는 주요 3요소를 모두 성취했다. 전국의 국립, 사립 기관, 그리고 개인소장가들의 근대 대표작들을 대여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작품 하나를 보러 지방 먼 곳까지 가기란 논문 쓸 때 아니고서는 꽤 어려운 일인데 이 전시가 한 번에 해결해줬다. 특히 해강 김규진의 그림을 바탕으로 수를 놓은 <자수매화병풍>은 최초로 공개되는 것으로 전시의 수준을 한껏 올려주었다.


전시 구성 역시 이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의 센스와 고민을 엿볼 수 있게 해줬다. 미술사 전시는 언제나 초점을 어디에 맞출지부터 고민하게 된다. 당시의 시대상을 증명해주는 도구로서 작품을 내놓을지, 아님 작품의 예술성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출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이 전시는 대한제국이라는 암울한 시대상을 한 꺼풀 벗겨 재조명하는 것도 목표로 삼았기에 역사적 맥락 역시 중요했다. 그렇다고 근대 거장들의 대표작들을 단순한 사료로 취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1실부터 제7실까지 이어지는 전시공간의 앞 부분은 근대 사진자료들과 함께 우리가 왜 대한제국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충실한 스토리텔링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후반부는 근대미술의 미술사적 가치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전시했다. 근대 서화가들의 요람인 '서화미술연구회', '동연사' 섹션이 대표적이다.


마지막 공간에는 개인적으로 세계 어디에 내놔도 스케일면에서, 작품 수준에서 자랑할만 하다고 여기는 창덕궁 대조전 벽화를 미디어아트로 대신하였다. 현실적으로 벽화를 대여해서(비단에 그린 작품이긴 하지만) 전시하기란 꽤 어렵다. 그러나 우리나라 왕실 미술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마감하는 이 작품들은 대한제국 전시의 필수이기에 미디어아트로 대신하여 그 스케일을 눈과 귀로 만끽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전시 공간 역시 꽤 큰 정성을 들인게 느껴졌다. 왕실 내부의 모습을 심플한 벽체로 꾸몄는데 마치 평일 한 낮에 아무도 없는 종묘에 들어선 듯한 고요한 위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왠지 의관을 정제해야만 될 것 같았다.


사진찍기 좋도록 꾸미고 전시 공간 디자인에만 집중하는 전시 풍토에 국립기관으로서 모범을 보여주는 전시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번, 세 번 봐야할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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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한 공간>전을 보고 / 세화미술관

2018. 11. 8.


저녁노을이 질 때쯤 광화문 사거리 횡단보도에 서서 노을이 지는 쪽을 바라보면 묵묵히 일하고 있는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망치질 하는 사람(Hammering Man)>을 볼 수 있다. 망치질 하고 있는 모습이 역설적으로 너무나 고요해서 마치 종교의식을 치르고 있는 느낌마저 드는 조각상이다. 구스타프 쿠르베가 19세기 파리의 노동자들을 성스럽게 표현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몸짓이랄까.


조각상 옆에는 흥국생명 빌딩이 있는데 이 건물 3층에 세화미술관이 들어서있다. 광화문을 자주 가면서 세화미술관 방문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빠르게 지나가는 길목에 있어서 지나다니며 언제 가봐야겠다고 다짐만 했다가 이번에 처음 다녀왔다.


이번 전시는 꼭 봐야겠다고 생각을 한 이유는 전시 소개글에서 찾을 수 있다.


관람객은 화이트큐브의 경직된 공간 대신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미술관 공간을 체험하게 된다. 직조 등 전통 섬유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에서부터 광섬유를 활용한 오브제, 실을 연결하여 공간 사이에 관계를 형성하는 작품, 패브릭을 활용한 공간 드로잉, 실로 감싼 집 등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섬유의 물성을 활용하여 공간과 적극 소통하며 각각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펼친다.


대개 회사 빌딩에 입주한 미술관들은 전시 공간의 제약을 많이 받는다. 어쩔 수 없는 한계이며 큐레이터들은 전시를 할 때마다 고생하게 되고, 아쉬움이 많다. 세화미술관 역시 흥국생명 빌딩 3층에 있어서 같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 가장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으로 화이트큐브형으로 공간을 꾸미는 것을 들 수 있다. 쉽게 말해 창문을 가린 직육면체 공간에 하얀 페이트칠을 한 벽으로 마감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하면 전시는 단조로워질 수 밖에 없다. 벽에 회화작품을 높이만 통일해서 걸어버리거나, 마치 무심한 손길로 놓은 듯 조각상을 비정형으로 배치하는 것으로 끝내기 때문이다. 나처럼 전시기법 보다는 작품에 더 집중하는 미술사 연구자들은 작품만 보면 되기 때문에 크게 신경쓰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전시 자체는 심심해져 작품이 주는 효과가 반감되는 경우가 많다. 전시 소개글에서 말한대로 이런 한계가 있는 공간을 어떻게 채웠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섬유 재료를 공간 연결에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해서도 보고 싶었다.


<유연한 공간>전은 섬유를 주재료로 사용하는 공예작가 5인(강은혜, 노일훈, 박혜원, 정다운, 차승언)을 선정하여 각 공간을 담당하게 한 전시이다. 작가들은 작품을 세화미술관 속 공간을 적극 활용하여 제작했다. 집 속에서 뻗어나오는 빛을 벽에 비춰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인연에 대해 보여주거나(박혜원), 공간을 마치 고구려 고분벽화인 <수렵도>의 무대처럼 꾸며 새로운 산수, 풍경을 선보였다(노일훈). 서울역사박물관 쪽에서 비춰오는 햇빛으로 패브릭의 화려한 원색을 강조하여 시각적 즐거움을 보여주는 공간(정다운)은 전시실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찾아보게 만들었다.


전체 전시공간 역시 제목(유연한 공간)에 걸맞게 잘 구분했다. 전체 공간은 작지만 많은 것을 보고 온 느낌이 들 정도였다. 조용히 생각에 잠긴채 관람하기 좋은 전시였다. 특히 설치미술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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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신여성 도착하다' 특별전의 짧은 단상

2018. 1. 1.


미술작품을 역사의 증거물로 사용하는 연대기적 전시 형식과 텍스트를 최소화하여 작품 자체에 집중하게 만드는 전시 형식이 있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의 <신여성 도착하다>전은 연대기적 전시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지식 함양과 볼거리는 많아 재밌는 전시였다. 그러나 명품이 명품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흐름 속에 부속물로만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도 남는다. 전공자들은 명품이란걸 알고 나름 감동하며 감상할 수 있지만, 비전공자들에겐 명품인지 아닌지도 모른채 지나치게 되어있다.


물론 둘 중에 어떤 형식이 옳고 그르다는건 없다. 전시에 나올 작품의 성격과 큐레이터의 의도에 따라 적절하다고 여기는 형식을 따르면 될 뿐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국립’이라는 의무감이 있기 때문에 과감한 형식을 선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최대한 스탠다드한 형식을 취해야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명품이 흐름 속에 침잠되어 있다는 아쉬움을 조금 덜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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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사온 도록, 책들

2017. 11. 24.


사실 단행본이나 도록보다는 도쿄에 한 일주일 머무르며 국회도서관에서 복사해오는게 더 유용하지만 이렇게나마 만족해야겠다. 좋은 전시들을 보고 논문에 사용할 도판들과 두고두고 참고할 사전류 책들을 사온게 어디랴 싶기도 하다. 7년 전쯤 석사논문 쓸 때 9박 10일동안 큐슈에서 차를 빌려 각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자료 찾던 때가 생각난다. 차를 렌트하니 점점 무거워지는 짐을 걱정할 필요없이 손이 닿는대로 모두 찾아오고 복사해올 수 있었다.

가끔 직장인으로 살면서 공부에 할애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마다 그 때처럼 한 달정도 일본에 머무르며 자료를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실현 가능할지 의문이다. 내가 지금 일하는 박물관을 과감하게 그만두고 옛날처럼 공부만 하기 위해 떠날 수 있을까?


이번 출장의 주목적이 되었던 교토국립박물관의 개관 120주년 기념 <국보전> 도록이다. 2009년에 시즈오카현립미술관에서 봤던 <조선왕실의 회화와 일본전>만큼 어마어마한 명품들과 스케일을 과시하는 전시였다. 개관 시간 전에 도착했는데 1시간 반을 줄서서 기다렸고 전시실 내에서도 인파에 휩쓸려 다녔다. 일본인들의 자국 문화 애호의식에 새삼 경탄했고 부러움만 가득 안고 돌아왔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이 도록은 3년 전에 도쿄국립박물관에서 했던 <일본국보전>의 도록이다. 굉장한 귀인이 일본미술사를 공부하는 나를 위해 사다줘서(부탁도 안했는데) 볼 때마다 고맙고 안부가 궁금해지는 도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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