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s]《여세동보(與世同寶)》전을 보고 / 대구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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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무량수전을 닮은 대구간송미술관

대구간송미술관은 대구미술관과 함께 대구시가 내려다 보이는 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시내와 조금 떨어져 있어 번잡하지 않고 고요하여 날을 잡고 전시를 보기 좋은 장소였다.

차에서 내려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자 아름드리나무 기둥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미술관 건축의 전체 생김새가 계단식 기단에 터를 분절시켜놔서 마치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석사에서 산 아래를 시원하게 내려다보는 것처럼 대구간송미술관도 입구에 서면 대구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우리나라 문화재의 보고이자 한국미술사의 상징적인 존재인 간송미술관의 정체성을 잘 살린 건축이라 할 만했다. 곳곳에는 소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미술관 건물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었다.

1층 매표소 뒤에는 ‘아카이브 집’이라는 공간이 있다. 미술관의 도서관으로 마련한 곳인데 이제 시작 단계여서 그런지 책장에 책이 가득하진 않았다. 일단은 그동안 내부애서 연구할 때 활용하던 책들을 모아 놓은 것 같았다.

그동안 성북동과 DDP에서 전시를 할 때 간행했던 도록들을 모두 볼 수 있도록 따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형형색색의 정방형으로 된 간송 특유의 도록 규격을 보자 학부생 때부터 드나들었던 성북동 시절의 추억이 금세 밀려왔다. 그때는 도록이 너무 비싸서 사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었다.

테이블에는 아이맥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PDF로도 도록을 검색해서 볼 수 있게 해놓았다.


명품의 향연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 전시

이번 전시의 제목은 《여세동보(與世同寶)》로 '세상과 함께 보배 삼아'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대구간송미술관의 개관기념 특별전에 걸맞게 간송미술관이 자랑하는 회화, 도자, 불교미술, 서예 등 다양한 장르의 국보급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였다. 그중에서도 신윤복의 <미인도>와 《혜원전신첩》, 정선의 진경산수,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이전부터 사랑받았던 작품들 앞에 관람객들이 많이 모여서 감상하고 있었다.

진열장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로 관람하고 있지만 의무는 아니다. 줄에서 한 발 떨어져서 보고 넘어가도 되고 이외에 보석같은 작품들도 매우 많으니 굳이 사람들 사이에 껴서 시간을 다 보낼 필요는 없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진 않았으나 추천하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김정희, 《난맹첩》, 1830-1840년대, 종이에 먹, 23.0×13.6, 보물
    • 김정희는 사실 회화보다 서예로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의 추사체는 모든 기본 서체와 역대 명필들의 글씨를 융합하고 자신만의 개성을 담아 만든 서체로 괴기함과 예리함, 굳건함과 리듬감 등 글씨를 통해 내보일 수 있는 감각을 모두 갖추고 있다.
    • '난맹'은 '마음을 함께 하는 모임', '난을 그릴 때의 다짐'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김정희에겐 신분을 가리지 않은 스승, 선배, 친구, 제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대부분 그의 서화에 영향을 받아 '김정희 일파'라는 말이 성립될 정도다.
    • 김정희는 제주 유배를 다녀온 후에 묵란화를 거의 그리지 않았지만 제자들에게 묵란화를 가르치는 일은 지속하였다. 《난맹첩》은 제자들에게 묵란화의 교과서 같은 역할을 한 작품으로 개성을 담았다기보다는 묵란화의 정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난맹첩》에서 김정희는 글씨를 쓰듯 난을 그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굵게-가늘게-다시 굵게 그어내리는 붓질로 난잎의 굵기를 조절하는 삼전법, 꽃은 점과 삐침으로 단순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점 등은 서예를 회화에 적용시킨 대표적인 방식이었다.

  • (왼쪽) 김정희, 『서원교필결후』, 1844 / (오른쪽) 이광사, 『서결』, 1764
    • 오른쪽의 이광사는 18세기를 대표하는 서예가이고, 왼쪽의 김정희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서예가이다.
    • 이광사가 활동했던 18세기는 중국적인 것에서 벗어나 가장 조선적인 미술이 발전했던 때로 우리의 자연을 그린 진경산수, 우리의 일상을 그린 풍속화가 크게 유행했다. 서예에서도 중국 서체에서 벗어나 조선적인 글씨가 풍미했다. 원교 이광사가 그 중심에 있었다. 그의 글씨는 붓을 뉘어서 빗질하듯 쓰는 게 아니라 붓털의 모든 면을 활용하여 서체가 활달하고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동세가 느껴진다. 조선의 고유성을 강조하며 회화에서 진경을 붙여 진경산수라 하듯, 이광사의 서예를 ‘동국진체’라 한다. 전시에 나온 오른쪽의 『서결』은 이광사의 서예이론서다.
    • 반면 김정희는 금석학과 고증학 연구를 통해 글씨의 기원을 탐구하고 중국의 역대 명필의 서예를 학습하여 ‘추사체’를 만들었다. 중국의 서예를 배우는 것은 김정희나 이광사나 마찬가지였지만 표현방식에서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시에 나온 왼쪽의 『서원교필결후』는 김정희가 이광사의 『서결』을 읽고 쓴 비평서다.
    • 김정희는 이광사에 대해 “가만보니 원교는 붓 잡는 법과 먹 쓰는 법도 모른다”, “원교가 타고난 재능은 있지만 배움(學)이 없어서 그런 거니 그의 허물은 아니다”는 말까지 할 정도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 중국 서화에 경도된 김정희의 입장에서는 자주적이고 조선만의 서체를 만들었던 이광사의 서예가 탐탁치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각자 자신이 살던 당시의 시대정신에 맞춰 예술을 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특징이 무엇이고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며 비교하면 될 일이다.
    • 전시에서는 사진처럼 나란히 배치해놨으니 어떤 글씨가 더 멋있고 마음에 와닿는지를 비교하며 관람하면 나의 취향을 찾고 안목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이정(李霆), 《삼청첩》, 1594, 검은 비단에 금니, 39.3×45.8(표지), 보물
    • 검은 바탕에 금색 안료로 그려 화려함과 중후함을 모두 머금고 있는 이정의 《삼청첩》이 전시실 입구에서 맞이해주고 있다.
    • 이 작품은 금니화(金泥畵)다. 금니(金泥)는 순금의 분말을 아교로 붙여서 먹으로 만든 것으로 검은색 바탕의 비단에 그려져있어 '기품있는 우아함'이라는 표현이 절로 나오게 되는 제작방식이다. 화려함에 치우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중간의 경계를 예리하게 포착하였다.
    • ‘삼청’은 매화, 대나무, 난초를 가리키고 사군자의 식물들답게 군자의 표상으로 그려진 소재다. 이정의 시와 그림, 이를 감상한 사람들의 글이 함께 실려있어 당대 문인문화의 발달을 잘 보여준다.
    • 이 작품의 제작시기는 1594년으로 임진왜란이 한창 진행중일 때였다. 좋게 보면 전란 속에서도 예술 의지가 꺾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고, 실눈을 뜨고 보면 '지금 이럴 때인가?'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양가감정이 투영되는 작품이었다. 어쨌든 한국미술사에서 조선 중기 회화를 공부할 때는 "전란과 국토의 황폐화 속에서도 미술은 건전한게 발전했다"고 외우긴 해야 한다.

  • 김홍도, <마상청앵>, 18세기 말-19세기 초, 종이에 옅은 색, 117.2×52.0, 보물
    • 김홍도는 풍속화로 너무 유명하여 풍속화가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산수, 인물, 초상 등 못그리는 게 없는, 말 그대로 '천재'라는 수식어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 도화서 화원출신이지만 문인화가들처럼 시도 잘 쓰고 서예도 매우 수준이 높았다. 우스갯소리로 김홍도는 중국 대륙에 떨궈놓으면 중국미술사의 흐름을 바꿀 정도라는 말을 할 정도다.
    • <마상청앵>은 당나귀를 탄 선비가 길을 가다가 꾀꼬리를 보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소리가 없는 그림이지만 선비의 시선과 꾀꼬리의 만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대각선 구도 덕분에 마음이 요동치며 괜히 꾀꼬리의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다.
    • 옅은 색으로 섬세하게 칠하여 따스해지는 봄날의 온도마저 느끼게 해준다.
    • 이외에도 김홍도의 필력을 제대로 맛보게 해줄 고사인물도와 산수화도 많이 출품되어 있다. 그의 신묘한 필치를 느낄 수 있다면 대구행은 분명 성공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 심사정, <촉잔도권>, 1768, 종이에 옅은 색, 58.0×818.0, 보물
    • <촉잔도권>은 조선 후기 문인화를 대표하는 심사정의 대작이다. 세상을 떠나기 전 해에 완성한 것으로 우리나라에 흔지 않은 매우 긴 두루마리 작품이다. 가로 길이가 무려 8미터에 달한다.
    • 이백의 시 「촉도난」을 소재로 했고 현재 중국의 쓰촨성인 서촉 지방으로 가는 험준한 산세를 잘 표현하였다.
    • 산을 그리는 준법을 다양하게 구사하여 산의 입체감을 잘 나타냈고 이 산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촉으로 가는 길이 정말 험하다는 느낌을 단번에 전해준다. 일생에 걸쳐 갈고 닦은 자신의 실력을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토하듯 펼쳐냈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 <청자상감운학문매병>, 13세기, 높이 41.7, 국보
    • 어릴적 교과서에서 봤던 기억이 있을 정도로 매우 유명한 청자 작품이다.
    • 작품의 완벽한 조형미만으로도 명품이라 할 만하지만 이 작품이 특히 더 대우받는 이유는 구름과 학 문양 때문이다.
    • 고려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일하게 개국부터 멸망까지 줄곧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왕조다. 그래서 고려의 문화는 불교와 연관지어 생각할 때가 많은데 구름과 학 문양은 도가사상과 관련이 깊다. 학을 타고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신선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불교의 나라였던 고려에서 청자의 최전성기에 상감기법으로 구름과 학 문양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은 당시에 도가사상이 널리 퍼져있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즉 이 작품은 당시의 문화상, 사람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매체로서 문화사적 의의도 지녔다고 봐야 하기 때문에 특히 더 귀하게 대접받고 있는 것이다.

  • <분청사기박지철채연화문병>, 15세기, 높이 20.0, 보물
    • 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의 준말로 고려 말에 상감청자가 대중화되면서 나온 도자기다. 그래서 분청사기가 처음 제작될 때는 상감청자와 닮았고, 시간이 조금 흘러 조선 초기에 만든 분청사기는 점차 백자와 닮아지려는 노력이 많이 투영되었다. 그래서 같은 분청사기라도 시기별로 다른 양식을 갖고 있다.
    • 이 작품은 청자보다 더 어두운 태토에 백토를 얇게 발라 긁어내며 큼직한 연꽃 문양을 만든 것이다. 배경에는 녹색의 안료를 칠한 후 유약을 발라 구워서 푸르스름한 빛이 더 많이 난다.
    • 우리가 익히 봐왔던 백자스러운 분청사기가 아닌 청자와 닮았던 초기 분청사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18세기, 높이 42.3
    • 10년 전 DDP에서 간송미술관 전시를 했을 때 보고 오랜만에 보게 된 작품이다. 당시의 기억이 조금 왜곡되었는지 이번에 보니 기억에 있던 모습보다 몸체의 볼륨이 더 커서 의아해하며 봤다. 역시 작품은 실물을 자주 봐야 한다.
    • 길쭉하고 긴 목과 원형에 가까운 몸체의 연결이 매우 자연스러워 높은 조형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영조와 정조연간에는 비싼 청화백자가 횡행해서 사치풍조를 억제하고자 민간에서의 청화백자 사용을 금지했었다. 그런데 화려한 문양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법으로 금한다고 하여 바로 순백자를 쓰면 밍밍하고 참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유행한 게 양각문양이다. 색으로 문양을 낼 수 없다면 양각으로나마 대리만족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제작경위는 알 수 없지만 양각문양에 그치지 않고 청, 홍, 갈의 삼채를 더하여 마치 한 폭의 채색화를 보는 듯하다. 보통 여러 색을 태우지 않고 잘 구우려면 가마의 온도 조절이 매우 섬세해야 하는데 이를 성공시킨 작품으로서 당시 도자기 제작기술의 우수함도 함께 엿볼 수 있다.

  •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563, 높이 17.7, 국보
    • 삼국시대 불교미술을 공부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작품으로 우리나라 초기 불교조각을 대표한다. 6세기 동아시아에서 유행한 '일광삼존불'형태를 갖고 있다. 즉 광배 하나에 세 명의 불보살상이 붙어있는 형태라는 의미다.
    •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조형성이 뛰어난 것도 중요하지만 많은 정보가 담겨 있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만약 조형성은 뛰어나지만 제작연대, 경위도 알 수 없는 작품과 조형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제작연대와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정보를 담고 있는 작품 중에서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당연히 후자를 택할 것이다. 이 작품은 광배에 '563년 11월 1일 보화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만들었다'는 문장이 새겨져있고 조형성도 매우 뛰어나 그야말로 국보에 걸맞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이전 시기의 작품들은 광배에 불꽃문양 하나만 내었던 데 반해 이 작품은 불꽃문양과 함께 불상 뒤로 몸통의 광배와 머리의 광배도 더 만들어서 훨씬 입체적인 느낌이 든다.
    • 그리고 대좌의 연꽃잎도 사실적으로 얇게 잎을 만들어 세 번 겹쳐놓았고 잎의 볼륨감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이전 시기에 비해 발전된 기술을 잘 보여준다.
    • 도판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가서 보면 생각보다 작은 크기에 한 번 놀랄 것이고, 그럼에도 세밀한 표현력에 두 번 놀라게 될 것이다.

대구간송미술관의 다음 전시는?

이번 개관기념전은 말 그대로 개관을 기념하는 전시이므로 간송미술관의 좋은 작품들로 처음 인사하는 전시였다. 10년 만에 보는 작품들도 있어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선 반가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 아무리 좋은 작품, 명품이어도 매번 보면 식상해지지 않을까. 국보도 자주 볼 수 없어야 귀한 것이라는 느낌이 더 살아나지, 언제 가도 볼 수 있다면 그 가치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대구간송미술관의 이번 전시는 일회성이 아니다. 개관기념전이 끝나면 미술관의 역할을 해나가야 한다. 상설전, 기획전, 교육, 도록 출간, 학술대회, 지역작가 소개 등 지역의 미술관으로서 할 일이 끊김없이 이어지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상설전이 중요하다. 상설전은 기관의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차원에서 기획전보다 더 중요하다. 시대별로 전시실을 구성하는 것은 아무래도 국립박물관처럼 소장품을 고루 갖춘 것은 아니기에 부실하게 느껴질 우려가 있다. 고루 보여주되 간송의 소장품 특색을 잘 살릴 수 있는 주제를 잘 선정해야 한다.

다른 기관과 차별성을 두면서도 상설전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간송의 소장품을 고루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생각해내야 한다. 예를 들어 섹션 구분을 ‘사물, 이미지, 시간, 공간’, ‘점, 선, 면’ 이런 식으로 파격적인 상설전 구성을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해야 할 점은 장기적으로 해도 괜찮은 구성인지 여부다. 상설전이기에 긴 호흡으로 바라보고 접근해야 한다. 촌스럽지 않아야 하고, 너무 트렌디해서도 안된다.

전시를 보는 동안 이 명품들이 다시 수장고로 들어가면 이 큰 공간을 어떻게 채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획전은 성북동에서 오랜 세월 동안 해왔던 것처럼 진경산수화, 추사화파, 오원화파, 명청시대 회화 특별전처럼 연구성과가 뒷받침된 전시로 해도 좋을 듯하다. 그게 또 간송미술관의 매력이었기 때문에 기획전은 전통을 살려서 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번 개관전은 인산인해를 이루며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개관전은 첫 인사이기에 관람객의 배려와 너그러움이 넘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마 두 번째부터는 없을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