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희, <세한도>, 1844년, 종이에 먹, 23×69.2,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초 조선은 조선 왕조 내에서 세도정치가 진행되었던 시기이다. 세도정치는 조선 왕조의 외척이 된 가문이 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로, 순조 대에 본격화되었다, 1800년 정조의 아들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신 안동 김씨인 김조순 부원군이 순조의 장인으로서 정치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그리하여 안동 김씨 일족은 높은 지위와 많은 관직을 차지했다. 이후 1834년 순조의 손자인 헌종이 8세의 나이로 즉위할 때에도 순조의 왕비이자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가 어린 헌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려진 <세한도>는 1844년 명문가 자제 김정희가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그린 작품이다. 윤상도 옥사 사건은 1830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하급관리였던 윤상도가 안동 김씨 가문의 부패를 알리는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군신 사이를 이간질시켰다는 이유로 왕의 미움을 사서 추자도에 유배되었던 사건이다. 김정희는 상소문의 초안을 잡았다는 이유로 뒤늦게 이 사건에 연루되어 1840년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었을 때에도 그를 변함없이 챙겼던 제자가 있었다. 바로 중국어 통역관 이상적이었다. 이상적은 중국을 다녀오면 귀한 책들을 유배중인 김정희에게 보내주곤 했다. 김정희에게 책은 학문과 예술의 근원을 찾는 것이자 고독을 달래주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김정희는 이상적의 변치 않는 의리를 공자님 말씀을 담은 『논어』의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라는 유명한 구절에 빗대어 칭찬하고, 이를 <세한도>라는 그림으로 표현했다. ‘세한’은 혹독한 추위를 뜻하는 말로, 혼란한 세상, 곤궁한 처지를 의미하고, ‘송백’은 한 겨울의 눈바람과 서리를 이겨내고 푸름을 유지하는 생태적 특성에서 절조의 상징이 되어왔다. 그리하여 이 구절은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는 뜻을 가진다.
수묵 위주의 문인화적 화풍인 남종화풍을 따르는 김정희는 <세한도>를 그릴 때 마른 먹 중에서도 타버린 재와 같은 아주 짙은 색의 먹으로 거칠게 그리는 갈필법을 구사하였다. 갈필법은 수묵화의 기법들 중 하나로, 의도적으로 붓의 물기를 적게 하여 거칠고 메마른 효과를 내는 기법이다. 종이 역시 매끄러운 화선지 대신 까칠한 종이를 사용해 더욱 메마른 듯한 갈필의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그리고 주변을 텅 빈 여백으로 마무리하여 최고도의 절제미와 간결함을 표현하였다. 거친 종이 위에 칠한 대담한 붓질과 단순한 구성 등이 유배지에 있는 추사의 쓸쓸한 내면을 잘 보여준다. 그 쓸쓸함 속에서 유배생활 중인 김정희는 자신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이상적을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고 추위를 이겨내는 측백나무와 소나무에 빗대어 칭찬하였다.
작품의 오른쪽 위에는 歲寒圖 藕船是賞 阮堂(세한도 우선시상 완당)이라고 적혀있다. ‘세한도 우선 보시게나. 완당’이라는 의미이다. 완당은 김정희의 호로, 그가 이상적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을 서화로 표현한 것임을 할 수 있다. 阮堂(완당) 아래에는 붉은 색 인장이 찍혀있다. 인장에는 김정희의 이름인 正喜(정희)가 적혀있다. 그리고 작품 오른쪽 아래에도 붉은색 인장이 찍혀있는데, 인장에는 長毋相忘(장무상망)이라고 적혀있다. 長毋相忘(장무상망)은 ‘오래도록 잊지 말자’라는 의미로, 김정희가 이상적에게 추운 겨울에도 변함없이 푸르른 송백의 절개를 오래도록 잊지 말자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다.
김정희는 <세한도>를 그린 후 이상적에게 선물했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가지고 중국을 방문하여 평소 친하게 지내던 청나라 문인 장요손이 주최한 모임에서 작품을 소개했다. 이후 그림을 본 청나라 문인 16명이 감상 글을 적었다. 청 문인들은 <세한도>에 담긴 ‘군자가 송백과 같은 절의를 지키는 일의 어려움과 중요성’에 대해 글을 썼다. 장악진은 “세한 전 송백의 절조를 먼저 배워야 한다. 오직 그 절조가 항상 있기 때문에 사철 내내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그 절조를 알아주는 자가 없어도 송백은 태연자약하다.”라며 평소 문인으로서 절개와 지조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요손의 매형인 오찬은 “군자는 힘들수록 더욱 굳세어지니 받아주지 않는다 해도 무엇을 걱정하랴.”라며 군자의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강조했다. 이렇듯 <세한도>는 어떠한 역경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지조와 의리를 지키는 자세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그림이었다. 그리하여 <세한도>는 김정희 자신의 생각과 의도가 가장 적절한 제목, 소재, 필법, 인장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최고의 문인화로 평가받는다.
written by 한지원
김정희, <세한도>, 1844년, 종이에 먹, 23×69.2,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초 조선은 조선 왕조 내에서 세도정치가 진행되었던 시기이다. 세도정치는 조선 왕조의 외척이 된 가문이 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로, 순조 대에 본격화되었다, 1800년 정조의 아들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신 안동 김씨인 김조순 부원군이 순조의 장인으로서 정치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그리하여 안동 김씨 일족은 높은 지위와 많은 관직을 차지했다. 이후 1834년 순조의 손자인 헌종이 8세의 나이로 즉위할 때에도 순조의 왕비이자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가 어린 헌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려진 <세한도>는 1844년 명문가 자제 김정희가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그린 작품이다. 윤상도 옥사 사건은 1830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하급관리였던 윤상도가 안동 김씨 가문의 부패를 알리는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군신 사이를 이간질시켰다는 이유로 왕의 미움을 사서 추자도에 유배되었던 사건이다. 김정희는 상소문의 초안을 잡았다는 이유로 뒤늦게 이 사건에 연루되어 1840년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었을 때에도 그를 변함없이 챙겼던 제자가 있었다. 바로 중국어 통역관 이상적이었다. 이상적은 중국을 다녀오면 귀한 책들을 유배중인 김정희에게 보내주곤 했다. 김정희에게 책은 학문과 예술의 근원을 찾는 것이자 고독을 달래주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김정희는 이상적의 변치 않는 의리를 공자님 말씀을 담은 『논어』의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라는 유명한 구절에 빗대어 칭찬하고, 이를 <세한도>라는 그림으로 표현했다. ‘세한’은 혹독한 추위를 뜻하는 말로, 혼란한 세상, 곤궁한 처지를 의미하고, ‘송백’은 한 겨울의 눈바람과 서리를 이겨내고 푸름을 유지하는 생태적 특성에서 절조의 상징이 되어왔다. 그리하여 이 구절은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는 뜻을 가진다.
수묵 위주의 문인화적 화풍인 남종화풍을 따르는 김정희는 <세한도>를 그릴 때 마른 먹 중에서도 타버린 재와 같은 아주 짙은 색의 먹으로 거칠게 그리는 갈필법을 구사하였다. 갈필법은 수묵화의 기법들 중 하나로, 의도적으로 붓의 물기를 적게 하여 거칠고 메마른 효과를 내는 기법이다. 종이 역시 매끄러운 화선지 대신 까칠한 종이를 사용해 더욱 메마른 듯한 갈필의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그리고 주변을 텅 빈 여백으로 마무리하여 최고도의 절제미와 간결함을 표현하였다. 거친 종이 위에 칠한 대담한 붓질과 단순한 구성 등이 유배지에 있는 추사의 쓸쓸한 내면을 잘 보여준다. 그 쓸쓸함 속에서 유배생활 중인 김정희는 자신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이상적을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고 추위를 이겨내는 측백나무와 소나무에 빗대어 칭찬하였다.
작품의 오른쪽 위에는 歲寒圖 藕船是賞 阮堂(세한도 우선시상 완당)이라고 적혀있다. ‘세한도 우선 보시게나. 완당’이라는 의미이다. 완당은 김정희의 호로, 그가 이상적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을 서화로 표현한 것임을 할 수 있다. 阮堂(완당) 아래에는 붉은 색 인장이 찍혀있다. 인장에는 김정희의 이름인 正喜(정희)가 적혀있다. 그리고 작품 오른쪽 아래에도 붉은색 인장이 찍혀있는데, 인장에는 長毋相忘(장무상망)이라고 적혀있다. 長毋相忘(장무상망)은 ‘오래도록 잊지 말자’라는 의미로, 김정희가 이상적에게 추운 겨울에도 변함없이 푸르른 송백의 절개를 오래도록 잊지 말자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다.
김정희는 <세한도>를 그린 후 이상적에게 선물했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가지고 중국을 방문하여 평소 친하게 지내던 청나라 문인 장요손이 주최한 모임에서 작품을 소개했다. 이후 그림을 본 청나라 문인 16명이 감상 글을 적었다. 청 문인들은 <세한도>에 담긴 ‘군자가 송백과 같은 절의를 지키는 일의 어려움과 중요성’에 대해 글을 썼다. 장악진은 “세한 전 송백의 절조를 먼저 배워야 한다. 오직 그 절조가 항상 있기 때문에 사철 내내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그 절조를 알아주는 자가 없어도 송백은 태연자약하다.”라며 평소 문인으로서 절개와 지조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요손의 매형인 오찬은 “군자는 힘들수록 더욱 굳세어지니 받아주지 않는다 해도 무엇을 걱정하랴.”라며 군자의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강조했다. 이렇듯 <세한도>는 어떠한 역경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지조와 의리를 지키는 자세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그림이었다. 그리하여 <세한도>는 김정희 자신의 생각과 의도가 가장 적절한 제목, 소재, 필법, 인장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최고의 문인화로 평가받는다.
written by 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