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송미술관 보화각, 그 마지막 전시 이후의 소회
이장훈(독립 큐레이터)
9년 만에 방문한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가볼 수 없었던 그간의 시간을 새삼 체감할 정도로 공간 이곳저곳이 비어 있었다. 간송미술관 정문에 들어서면 시야에 가득 들어오던 울창한 정원과 하얀 공작은 사라지고 텅 빈 운동장 같은 곳에 보화각만 덩그러니 서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최근에 조성한 오피스棟이 보화각과 마주하고 있다. 학부생 시절부터 거의 매년 봄과 가을 전시를 보러 갔던 장소에서 쌓은 추억만큼, 간송미술관에 대한 애착과 아쉬움이 많이 남았음을 이번 전시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간송미술관은 자랑스러운 보고이자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준 고마운 대상이었다. 물론 봄과 가을, 두 차례 무료로 전시를 보여주는 것 말고는 작품을 열람할 수 있게 해주거나, 도판 사진을 제공하는 등 직접 도움을 준 적은 없었지만, 존재 자체가 위안이 되고 고마운 일종의 사원(寺院) 같은 곳이었다.
대학원에 입학해 학문을 한다는 건 또 다른 사회생활을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싶어했던 근본적인 이유를 잊을 때가 있다. 학위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데, 목적 그 자체가 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간송미술관 전시를 보거나, 간송 전형필에 대한 일화를 접하면 차분히 나를 돌아보고 한국미술사 공부를 하고자 한 이유를 되새길 수 있었다.
마지막 전시가 준비한 ‘보화’
지난 5월 초, 지친 심신을 달래려 오랜만에 사원을 방문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간송미술관을 찾았다. 성북동에서 7년 만에 개최하는 전시 〈보화수보(寶華修補)-간송의 보물 다시 만나다〉(이하 〈보화수보〉)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해당 전시는 간송미술관이 대대적인 재정비를 앞두고 개최하는 마지막 전시이면서, 재정비에 들어가기에 앞서 간송미술관 보화각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간송미술관의 상징적 장소인 보화각의 2층 전시실을 비우고 빈 진열장을 그대로 관람할 수 있도록 마련했다.
작품은 1층에서 감상할 수 있는데, ‘낡은 것을 고치고 덜 갖춘 곳을 기운다는 의미’인 ’수보’라는 전시 제목에 걸맞게 최근 보존처리를 완료한 작품들로 마련되었다. 지난 2년 동안 여러 소장품 중에서 향후 지정문화재로 등록될 가능성이 높은 작품들을 대상으로 문화재청 지원,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지류회화 수리복원연구소 협력하에 보존처리 작업을 마친 결과를 볼 수 있다. 총 8건 32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초기부터 근대까지 조선시대 주요 서화가들의 작품을 두루 살필 수 있다.
작품의 배치는 1층의 작은 공간임에도 최대한 짜임새를 갖추고자 한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김홍도와 장승업의 도석인물화, 김명국과 한시각의 선종화, 《해동명화집》 속 작품들의 시대순 배치는 관람객들이 보다 선명하게 작품을 비교‧감상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작품의 대다수가 화가들의 개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출품된 이유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운미난첩》의 경우 표지 묵서에 “1896년 가을 9월 15일, 천심죽재가 난을 배웠습니다. 운미가 직접 써서 드립니다. 금래 사촌 형님께서 살펴 주십시오”라고 쓰여있어 민영익이 사촌형인 금래 민영소에게 선물한 화첩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묵란화의 다양한 형식을 총 72종으로 구분하여 그린 것을 볼 때, 이는 일종의 교본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교본의 성격상 표준에 맞게 그렸다는 점과 시기상 ‘운미난’이라고 불리는 화법을 얻기 전이라는 점으로 보아 이 작품에서 민영익 묵란화의 예술적 성취를 보기는 어렵다. 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화가별 개성과 전성기의 필치를 살펴볼 수 있으며 대표적으로 안견, 이인상, 김명국을 들 수 있다.
석농 김광국이 수집해 모은 화첩인 《해동명화집》 속 안견의 〈추림촌거〉는 일본 나라(奈良)현 덴리(天理)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어 보기 힘든 안견의 대표작 〈몽유도원도〉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줄 만한 작품이다. 안견 화풍의 대표적 특징인 근경 언덕의 소나무 모티프가 이 작품에도 그려져 있는데 흐트러지지 않은 정교한 필선은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한다. 또 흥미로운 점은 화면 옆에 공재 윤두서가 쓴 평으로 “안견은 많이 알지만 넓지 않고 굳세지만 강건하지 못하여 산에 기복이 없고, 나무에 앞과 뒤가 적다”고 적혀 있다. 조선후기 문인화가인 윤두서가 당시 유행한 남종문인화를 기준으로 안견의 작품을 평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의 안견에 대한 시각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로 작품 수가 현저하게 적은 안견에 대한 해석이 풍부해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인상의 〈풍림정거〉의 경우 안견과는 정반대로 ‘대교약졸(大巧若拙, 진정한 기교일수록 서투른 것처럼 보인다)’의 대명사답게 언뜻 질박하지만 필치는 날카롭고 옅은 먹과 색은 화면의 시원함을 더해줘 풍격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단풍나무 밑에서 수레를 멈춘다”는 의미의 〈풍림정거〉는 중국 당대(唐代) 두목(杜牧)의 시 〈산행〉을 주제로 해서 늦가을의 풍취를 그린 것이다. 붓이 마른 상태에서 그리는 갈필법을 쓰고 ‘ㄱ’자로 꺾어 굴절된 바위의 표면을 그리는 절대준법은 이인상이 즐겨 구사한 화법으로 이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얼핏 세부만 놓고 보면 어설프고, 배치도 각기 따로 노는 듯 설익어 보이지만 화면 전체로 보면 가운데에 있는 굳건한 나무들을 중심으로 짜임새가 절묘하게 완성된 이인상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여백과 담채를 적절하게 가해 그림이 숨쉴 곳 없이 빽빽하게 보이지 않고 적절한 지점에서 여유를 갖고 볼 수 있게 해준다. “능호의 묘처는 진함(농)이 아니라 담담한(담) 데에 있으며 익은(숙) 맛이 아니라 생생한(생) 맛에 있다. 오직 아는 자만이 이를 알리라.”라고 평가받은 바 있던 이인상 회화의 정수가 깃든 작품이다.
김명국의 〈수로예구〉는 선종화 특유의 붓놀림을 최소화한 감필법으로 그린 작품이다. 빠른 붓놀림으로 강약 조절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그려 필선의 비수차가 상당히 커서 호방함마저 느껴진다. 그의 높은 필력과 노련함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명국은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두 차례 다녀왔다. 이 작품처럼 감필법으로 그린 선종화가 일본인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되며 에도막부는 통신사 파견을 부탁할 때 김명국을 한 번 더 보내달라고 할 정도였다. 여러 이유로 세 번째는 가지 못했지만 일본 내 김명국 회화의 높은 인기를 가늠하게 해주는 일화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화가들의 주요 작품들과 보존처리 과정에 대한 설명, 그리고 그동안의 역사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보화각 2층의 텅 빈 모습까지. 〈보화수보〉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작품의 수준과 구성 덕분에 최근 본 전시 중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전시였다.
더불어 현재 “일단 매매하고 보자”는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미술품 매매열이 지속되고 있다. 모두가 수익성에 초점을 맞추어 미술품을 대하고 있는 요즘 오히려 그동안 잘 간직하고 있던 것을 꺼내어 ‘수보’해서 보여주는 것은 간송미술관이기에 잘할 수 있었고, 앞으로 간송미술관이 사회에서 해야 할 역할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간송미술관은 〈보화수보〉를 마지막으로 당분간 재정비에 들어간다. 재정비는 2019년에 등록한 이후 정식 사립미술관으로서 역할과 기능을 다 할 수 있도록 시설 보수에 목표를 두고 있다. 항온항습 시설, 햇빛 차단 및 조명기구 설치 등 현대식 미술관의 모습으로 바뀔 예정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만날 간송미술관에 바라는 점
2010년대 들어 간송미술관은 좋은 소식보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더 많았다. 이 글에서 문화유산과 사유재산의 간극에 대해 새삼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간송미술관의 2010년대 행보가 아쉬웠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박물관 등록이 너무 지체되었던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식으로 등록된 박물관이 아니기에 유지할 수 있었던 장점도 많았겠지만 수십 년간 1년에 두 차례 전시 외에는 작품을 공개하지 않는 등 운영이 폐쇄적이라는 인상도 있었다. 소장품의 미술사적 가치는 쉽게 변하지 않겠지만, 사람들 사이에 간직되는 작품에 대한 추억과 애정은 공유되지 않으면 금세 꺼지고 만다.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회자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해야 작품에 대한 해석이 풍성해지고 향유 가치가 더 높아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미술관의 자체 연구역량이 가장 중요하다. 간송미술관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한국미술사 연구의 한 축으로서 많은 연구업적을 쌓아온 곳이지만 앞으로는 등록미술관으로서 학예연구인력에 대한 적절한 대우와 연구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사업이나 일이 있을 때만 요청하는 단기적인 외부 자문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 소장품에 대한 내부 학예연구인력의 연구가 쌓이면 자연스럽게 기획은 풍부해진다. 지금까지 선학들이 쌓아온 연구 위에서 새로운 발굴과 해석이 더해져야 참신한 기획전시를 선보일 수 있다. 시대전, 작가전, 장르전 위주로 행해지고 있는 고미술 전시에서 벗어나 현대미술 못지않은 세련된 기획력을 간송미술관에서 볼 수 있길 바란다. 또한 깊이 있는 소장품 연구는 미술관 홍보 및 마케팅 활동, 교육프로그램 그리고 문화상품 제작에 이론적 기틀이자 참신한 소재가 되어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관련 연구자들이 소장품의 가치를 찾고 연구할 수 있도록 선뜻 공개할 수 있어야 한다. 수익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에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이런 일들이 축적되면 오히려 미술관의 브랜딩 작업에 기반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연구자에게 인심이 후한 곳 중에서 사랑받지 못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없다는 점을 간송미술관을 통해 다시 증명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마지막으로 여건이 나아지는 대로 소장품의 범주가 넓어지도록 적극적인 수집 활동을 펼쳐야 할 것이다. 현재 소장품만으로도 충분히 미술관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지만 기존 소장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소품류 외에 대작도 갖춘다면 전시의 역동성을 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전근대에 비해 기본적으로 크기가 커지는 경향을 지닌 근대미술 대작 수집은 간송미술관이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줄 테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곧 다시 볼 수 없게 될 간송미술관이 새로운 모습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사립박물관의 면모를 갖추고 돌아온다면 사람들은 기다림의 지루함을 잊고 반갑게 환영해주리라 생각한다. 간송미술관은 우리에게 언제나 그런 존재였다.
간송미술관 보화각, 그 마지막 전시 이후의 소회
이장훈(독립 큐레이터)
9년 만에 방문한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가볼 수 없었던 그간의 시간을 새삼 체감할 정도로 공간 이곳저곳이 비어 있었다. 간송미술관 정문에 들어서면 시야에 가득 들어오던 울창한 정원과 하얀 공작은 사라지고 텅 빈 운동장 같은 곳에 보화각만 덩그러니 서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최근에 조성한 오피스棟이 보화각과 마주하고 있다. 학부생 시절부터 거의 매년 봄과 가을 전시를 보러 갔던 장소에서 쌓은 추억만큼, 간송미술관에 대한 애착과 아쉬움이 많이 남았음을 이번 전시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간송미술관은 자랑스러운 보고이자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준 고마운 대상이었다. 물론 봄과 가을, 두 차례 무료로 전시를 보여주는 것 말고는 작품을 열람할 수 있게 해주거나, 도판 사진을 제공하는 등 직접 도움을 준 적은 없었지만, 존재 자체가 위안이 되고 고마운 일종의 사원(寺院) 같은 곳이었다.
대학원에 입학해 학문을 한다는 건 또 다른 사회생활을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싶어했던 근본적인 이유를 잊을 때가 있다. 학위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데, 목적 그 자체가 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간송미술관 전시를 보거나, 간송 전형필에 대한 일화를 접하면 차분히 나를 돌아보고 한국미술사 공부를 하고자 한 이유를 되새길 수 있었다.
마지막 전시가 준비한 ‘보화’
지난 5월 초, 지친 심신을 달래려 오랜만에 사원을 방문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간송미술관을 찾았다. 성북동에서 7년 만에 개최하는 전시 〈보화수보(寶華修補)-간송의 보물 다시 만나다〉(이하 〈보화수보〉)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해당 전시는 간송미술관이 대대적인 재정비를 앞두고 개최하는 마지막 전시이면서, 재정비에 들어가기에 앞서 간송미술관 보화각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간송미술관의 상징적 장소인 보화각의 2층 전시실을 비우고 빈 진열장을 그대로 관람할 수 있도록 마련했다.
작품은 1층에서 감상할 수 있는데, ‘낡은 것을 고치고 덜 갖춘 곳을 기운다는 의미’인 ’수보’라는 전시 제목에 걸맞게 최근 보존처리를 완료한 작품들로 마련되었다. 지난 2년 동안 여러 소장품 중에서 향후 지정문화재로 등록될 가능성이 높은 작품들을 대상으로 문화재청 지원,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지류회화 수리복원연구소 협력하에 보존처리 작업을 마친 결과를 볼 수 있다. 총 8건 32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초기부터 근대까지 조선시대 주요 서화가들의 작품을 두루 살필 수 있다.
작품의 배치는 1층의 작은 공간임에도 최대한 짜임새를 갖추고자 한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김홍도와 장승업의 도석인물화, 김명국과 한시각의 선종화, 《해동명화집》 속 작품들의 시대순 배치는 관람객들이 보다 선명하게 작품을 비교‧감상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작품의 대다수가 화가들의 개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출품된 이유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운미난첩》의 경우 표지 묵서에 “1896년 가을 9월 15일, 천심죽재가 난을 배웠습니다. 운미가 직접 써서 드립니다. 금래 사촌 형님께서 살펴 주십시오”라고 쓰여있어 민영익이 사촌형인 금래 민영소에게 선물한 화첩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묵란화의 다양한 형식을 총 72종으로 구분하여 그린 것을 볼 때, 이는 일종의 교본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교본의 성격상 표준에 맞게 그렸다는 점과 시기상 ‘운미난’이라고 불리는 화법을 얻기 전이라는 점으로 보아 이 작품에서 민영익 묵란화의 예술적 성취를 보기는 어렵다. 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화가별 개성과 전성기의 필치를 살펴볼 수 있으며 대표적으로 안견, 이인상, 김명국을 들 수 있다.
석농 김광국이 수집해 모은 화첩인 《해동명화집》 속 안견의 〈추림촌거〉는 일본 나라(奈良)현 덴리(天理)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어 보기 힘든 안견의 대표작 〈몽유도원도〉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줄 만한 작품이다. 안견 화풍의 대표적 특징인 근경 언덕의 소나무 모티프가 이 작품에도 그려져 있는데 흐트러지지 않은 정교한 필선은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한다. 또 흥미로운 점은 화면 옆에 공재 윤두서가 쓴 평으로 “안견은 많이 알지만 넓지 않고 굳세지만 강건하지 못하여 산에 기복이 없고, 나무에 앞과 뒤가 적다”고 적혀 있다. 조선후기 문인화가인 윤두서가 당시 유행한 남종문인화를 기준으로 안견의 작품을 평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의 안견에 대한 시각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로 작품 수가 현저하게 적은 안견에 대한 해석이 풍부해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인상의 〈풍림정거〉의 경우 안견과는 정반대로 ‘대교약졸(大巧若拙, 진정한 기교일수록 서투른 것처럼 보인다)’의 대명사답게 언뜻 질박하지만 필치는 날카롭고 옅은 먹과 색은 화면의 시원함을 더해줘 풍격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단풍나무 밑에서 수레를 멈춘다”는 의미의 〈풍림정거〉는 중국 당대(唐代) 두목(杜牧)의 시 〈산행〉을 주제로 해서 늦가을의 풍취를 그린 것이다. 붓이 마른 상태에서 그리는 갈필법을 쓰고 ‘ㄱ’자로 꺾어 굴절된 바위의 표면을 그리는 절대준법은 이인상이 즐겨 구사한 화법으로 이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얼핏 세부만 놓고 보면 어설프고, 배치도 각기 따로 노는 듯 설익어 보이지만 화면 전체로 보면 가운데에 있는 굳건한 나무들을 중심으로 짜임새가 절묘하게 완성된 이인상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여백과 담채를 적절하게 가해 그림이 숨쉴 곳 없이 빽빽하게 보이지 않고 적절한 지점에서 여유를 갖고 볼 수 있게 해준다. “능호의 묘처는 진함(농)이 아니라 담담한(담) 데에 있으며 익은(숙) 맛이 아니라 생생한(생) 맛에 있다. 오직 아는 자만이 이를 알리라.”라고 평가받은 바 있던 이인상 회화의 정수가 깃든 작품이다.
김명국의 〈수로예구〉는 선종화 특유의 붓놀림을 최소화한 감필법으로 그린 작품이다. 빠른 붓놀림으로 강약 조절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그려 필선의 비수차가 상당히 커서 호방함마저 느껴진다. 그의 높은 필력과 노련함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명국은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두 차례 다녀왔다. 이 작품처럼 감필법으로 그린 선종화가 일본인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되며 에도막부는 통신사 파견을 부탁할 때 김명국을 한 번 더 보내달라고 할 정도였다. 여러 이유로 세 번째는 가지 못했지만 일본 내 김명국 회화의 높은 인기를 가늠하게 해주는 일화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화가들의 주요 작품들과 보존처리 과정에 대한 설명, 그리고 그동안의 역사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보화각 2층의 텅 빈 모습까지. 〈보화수보〉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작품의 수준과 구성 덕분에 최근 본 전시 중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전시였다.
더불어 현재 “일단 매매하고 보자”는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미술품 매매열이 지속되고 있다. 모두가 수익성에 초점을 맞추어 미술품을 대하고 있는 요즘 오히려 그동안 잘 간직하고 있던 것을 꺼내어 ‘수보’해서 보여주는 것은 간송미술관이기에 잘할 수 있었고, 앞으로 간송미술관이 사회에서 해야 할 역할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간송미술관은 〈보화수보〉를 마지막으로 당분간 재정비에 들어간다. 재정비는 2019년에 등록한 이후 정식 사립미술관으로서 역할과 기능을 다 할 수 있도록 시설 보수에 목표를 두고 있다. 항온항습 시설, 햇빛 차단 및 조명기구 설치 등 현대식 미술관의 모습으로 바뀔 예정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만날 간송미술관에 바라는 점
2010년대 들어 간송미술관은 좋은 소식보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더 많았다. 이 글에서 문화유산과 사유재산의 간극에 대해 새삼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간송미술관의 2010년대 행보가 아쉬웠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박물관 등록이 너무 지체되었던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식으로 등록된 박물관이 아니기에 유지할 수 있었던 장점도 많았겠지만 수십 년간 1년에 두 차례 전시 외에는 작품을 공개하지 않는 등 운영이 폐쇄적이라는 인상도 있었다. 소장품의 미술사적 가치는 쉽게 변하지 않겠지만, 사람들 사이에 간직되는 작품에 대한 추억과 애정은 공유되지 않으면 금세 꺼지고 만다.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회자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해야 작품에 대한 해석이 풍성해지고 향유 가치가 더 높아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미술관의 자체 연구역량이 가장 중요하다. 간송미술관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한국미술사 연구의 한 축으로서 많은 연구업적을 쌓아온 곳이지만 앞으로는 등록미술관으로서 학예연구인력에 대한 적절한 대우와 연구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사업이나 일이 있을 때만 요청하는 단기적인 외부 자문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 소장품에 대한 내부 학예연구인력의 연구가 쌓이면 자연스럽게 기획은 풍부해진다. 지금까지 선학들이 쌓아온 연구 위에서 새로운 발굴과 해석이 더해져야 참신한 기획전시를 선보일 수 있다. 시대전, 작가전, 장르전 위주로 행해지고 있는 고미술 전시에서 벗어나 현대미술 못지않은 세련된 기획력을 간송미술관에서 볼 수 있길 바란다. 또한 깊이 있는 소장품 연구는 미술관 홍보 및 마케팅 활동, 교육프로그램 그리고 문화상품 제작에 이론적 기틀이자 참신한 소재가 되어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관련 연구자들이 소장품의 가치를 찾고 연구할 수 있도록 선뜻 공개할 수 있어야 한다. 수익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에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이런 일들이 축적되면 오히려 미술관의 브랜딩 작업에 기반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연구자에게 인심이 후한 곳 중에서 사랑받지 못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없다는 점을 간송미술관을 통해 다시 증명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마지막으로 여건이 나아지는 대로 소장품의 범주가 넓어지도록 적극적인 수집 활동을 펼쳐야 할 것이다. 현재 소장품만으로도 충분히 미술관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지만 기존 소장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소품류 외에 대작도 갖춘다면 전시의 역동성을 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전근대에 비해 기본적으로 크기가 커지는 경향을 지닌 근대미술 대작 수집은 간송미술관이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줄 테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곧 다시 볼 수 없게 될 간송미술관이 새로운 모습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사립박물관의 면모를 갖추고 돌아온다면 사람들은 기다림의 지루함을 잊고 반갑게 환영해주리라 생각한다. 간송미술관은 우리에게 언제나 그런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