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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산 이유

2019. 5. 19.

매력적인 남자를 지칭하는 말 중에는 뇌섹남이라는 단어가 있다.

단어 그대로 뇌가 섹시한 남자라는 의미이다.

 

아는게 많고, 지적인 사람 특유의 아우라는

유행을 타지 않는다.

만고불변의 매력이라 할 만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늘(일요일),

나는 여느 때와 같이 강의를 하러 광화문에 나왔다.

늘 그렇듯이 광화문역에 도착하여

교보문고를 한바퀴 둘러봤다.

 

책을 안살 때도 있지만

오늘은 꼭 한 권을 사고 싶었다.

대개 마음이 휑할 때 이렇다.

 

내 전공 공부만 하다보면

마음이 푸석푸석해진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뭔가 말랑말랑하고, 달착지근한 책이 땡기는 것이다.

 

마침 구글포토 속 ‘사고 싶은 책’ 앨범에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가 들어있었다.

얼마 전에 출간 소식을 보고 캡처해서 저장해놨던 책이다.

 

<알쓸신잡> 방송을 통해

저 작가의 책은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뇌섹남이 단순히 많은 지식을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건 당연한 조건이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 아는 지식을 내비치는

행동양식도 중요하다고 본다.

 

안다고 듣는 사람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고

지식을 쏟아내기만 하는건 지식업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김영하 작가는

방송에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자신의 이야기, 주장을 듣는 사람을 고려해가며

단어 선택을 하고, 태도를 결정하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신뢰가 갔다.

저 사람의 지식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책을 처음부터 읽지 않는다.

우선 촤르륵 넘기다가 내 의식에 확 다가오는 부분부터 읽은 뒤에

전후 내용을 보충하는 식으로 읽는다.

 

『여행의 이유』 중간 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다.

김영하 작가가 배낭여행 중에

파리에서 암스테르담을 갈 때 우연히 만난 백인 여성 두 명과

밤기차를 같이 탄 스물다섯살 때의 이야기이다.

 

밤기차는 한 칸에 세 명만 누워서 잠을 잘 수가 있는데

백인 여성 두 명이 김영하 작가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대개 여기까지만 들으면

남자들끼리의 술자리에서 안주거리로 삼을 것 같은 추억이다.

 

유럽에서!

그것도 파리에서 암스테르담을 가는 낭만적인 여정 속에서!

게다가 백인 여성 두 명과!!

 

그러나 김영하 작가는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시하고 있었다.

동양인 남자는 수줍고, 힘도 약하고, 예의가 바르기에

함께 밤을 지새도 결코 아무 일탈도 벌이지 않을 것이다는

백인 여성들의 선입견에 자신이 선택되었을 뿐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의 피해자가 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에 대해 불쾌감을 내비치거나,

‘내가 너희 속셈을 이미 다 알고 있느니라’며

자신의 지적 수준을 백인 여성들에게 과시하지 않았다.

 

알고 있음에도 백인 여성들이 안심하고 잘 수 있도록

조용히 제 역할을 해주고 다음 날 헤어져줬다.

 

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철없게 백인 여성들과 추억을 쌓았다며 들떠하지 않고

그녀들의 의도를 간파한 그의 지식 수준을 높이 산다.

그럼에도 안전한 밤을 원하는 그녀들의 입장을 존중하여 티내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해주었던 행동양식을 존경하게 되었다.

 

현재 이 내용만 본 상태인데

앞으로 읽어볼 다른 내용이 기대된다.

책을 잘 샀다는 뿌듯함마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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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라이프스타일 잡지, 『브루투스(Brutus)』

2019. 2. 26.


어제 한참을 통화하면서 서점을 서성였다. 나도 모르게 잡지 코너에 들어와있었는데 이 표지가 눈에 띄었다. 'Design-focused Lifestyle'을 표방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잡지 『Brutus』였다.

출판, 잡지시장이 날이 갈수록 열악해지는 우리나라에서도 미디어 브랜드에 대해 거론할 때마다 예시로 들만큼 대표적인 잡지이다. 평소 잘 읽던 잡지는 아니었지만 표지를 보자마자 통화는 통화대로 하면서 그냥 집어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그만큼 소장해두고픈 가치가 느껴졌다.

고대부터 현대에 걸쳐 죽기 전에 직접 보고 싶은 일본회화 100선이라니. 현재 활동중인 미술가가 미술사 속 걸작을 안내하는 것도 흥미로워 보였지만, 무엇보다 내 입장에선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어떤 작품을 선호하는지가 더 큰 관심사였다.

목차 구성도 단순한 700엔짜리(난 가격 얘기할 때 얼마 어치, 얼마 짜리라고 하는게 이상하게 좋더라. ㅋ 하루는 주요소에서 "5만원어치 주세요."라고 하니 옆에 있던 동생이 초딩같다고 마구 웃었던 적도 있지만 그래도 뭔가 정감있어 좋다) 잡지에 그치지 않고 미술관에서 파는 소형 도록 같았다. 이런게 득템이지.

목차 구성도 짜임새가 있다.

전쟁
초현실주의와 추상주의
누드
생명과 기원
풍경과 생활
다른 세계
모노가타리
자연
우키요에
기상의 계보
일본회화는 가구였다
동물
풍속
수묵화
에마키
초상화
종교
고대

로 이루어져있다.

라이프 스타일 잡지는 늘 'urban'한 문화만 다뤄야한다는 선입견을 깨준다. 그러나 진정한 라이프 스타일 잡지라면 일상에 작은 윤활제가 될 수 있는 무엇이든 다뤄야한다고 생각한다. 고미술에 관심없던 사람이어도 고요한 일요일 밤에 옛 것을 다루는 다큐를 보며 왠지 모를 포근함을 느끼며 잠자리에 드는게 현대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지하철 가판대에서 1,000원 주고 매주 사읽던 『무비위크』가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가격을 더 올려서라도 계속 간행되기를 바랐던만큼 손쉽게 가지고 다니며 읽기 좋았던 잡지였는데 폐간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나라 잡지 시장의 열악함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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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앤북, 자주 가고 싶어지는 서점이 명동에 생겼다.

2019. 1. 15.


1. 명동의 추억


지난 연말에 새로운 서점이 오픈했다. 서점 오픈하는 것이야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아마 자신이 자주 가는 동네에 생긴다면 느낌이 다를 것이다. 내게 아크앤북은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명동은 광화문과 함께 추억이 참 많은 곳이다. 일본에 어학연수를 다녀오자마자 명동 스타벅스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과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당시는 겨울연가, 보아 등을 중심으로 첫 한류 열풍이 일었던 때라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여행을 본격적으로 오던 때였다. 그 친구도 한류 붐을 타고 우리나라에 처음 놀러 온 터였다.


명동은 당시 그들에게 필수 코스였다. 명동의 화장품 매장들은 처음으로 일본어가 유창한 아르바이트생들을 고용했고, 좌판대에선 한류 스타들의 브로마이드와 같은 각종 상품을 팔기 시작했다. 모든 식당마다 일본어 메뉴판을 함께 마련해두기도 했다. 역사 속에서나 배우던 한일 문화교류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던 좋은 추억의 시기였다. 2005년에 일본 우익들의 본격적인 망언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한일관계가 참 평화롭게만 느껴졌던 마지막 시절이었다.


이런 추억이 있어서인지 명동은 언제나 여행을 온 듯한 느낌을 준다. 명동 거리를 가득 메운 외국인들 틈에서 나도 관광객이 되는 상상을 하게 한다. 그래서 가끔 여행이 가고 싶으나 여의치 못할 때는 명동엘 간다. 작년에 전시 자문으로 일본에서 교수님을 모신 적이 있다. 김포공항에서 교수님을 처음 뵌 것을 시작으로 3박 4일동안 명동에 있는 호텔과 박물관 오가는 길을 편하게 해드리고자 차로 모셔다 드렸다. 그리고 아침에 늦지 않겠다는 것을 핑계 삼아 나 역시 명동 호텔에 머무르며 진짜 관광객이 되어 보기도 했다. 항상 복잡하기만 한 명동 롯데백화점 앞 길을 모든 것이 잠이 든 새벽에 호텔 창가에 서서 감상하는 행운도 맞이할 수 있었다.


새벽 1시의 명동 앞 거리


아침 7시의 명동 앞 거리


2. 아크앤북 첫 방문


이런 추억을 간직한 명동에 서점이 생긴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자주 가게 될 것이란 느낌이 불현듯 들었다. 아크앤북이라는 서점으로 을지로입구역에서 1-1번 출구로 연결돼있어서 접근성도 아주 좋았다. 처음 방문을 한 날, 우선 서점 전체를 찬찬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우선 넓은 공간을 유기적으로 돌아다닐 수 있게끔 공간 배치를 잘 해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책 분류대로만 섹션을 구분한 것이 아니라 책구경을 하면서 '저기엔 뭐가 있을까?'라는 호기심이 들게끔 했다. 가운데에는 책 터널을 만들어 놓아 안쪽에는 카페와 쉴 곳을 마련해놔서 잠시 쉬었다 가기에 적당했다.



이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책과 문구류를 함께 배치해놓은 매대가 곳곳에 있었다. 항간에는 책이 중심이 아니라 다른 상품을 팔기 위해 책이 존재한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지만 내가 문구류 자체를 워낙 좋아해서인지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일단 나는 책을 사고 싶은 사람은 어찌 해놔도 책을 살테니 큰 문제 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빨간 전화부스처럼 전체적인 인테리어는 유럽 서점의 느낌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아크앤북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떠오른 것은 런던에 있는 <Daunt Books>였다. 짙은 고동색의 서가, 매대, 책 배치 방식 등이 유사해서 몇 년 전 런던에 갔을 때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래 사진 3장은 햇빛 쨍쨍한 어느 날, 갑자기 내리는 비를 맞으며 <Daunt Books>에 갔을 때 촬영한 것이다.


<Daunt Books>


<Daunt Books>. 저기 걸려있는 지도들 중에서 파리와 런던 지도를 사와서 한동안 방에 걸어두며 바라보곤 했다.


<Daunt Books>


다시 아크앤북으로 돌아와서.


미술 코너엔 어떤 책들이 있는지 가봤다. 책 분류도 기준있게 해놓았고, 종류도 다양해서 마음에 들었다. 신간과 두고두고 읽어 봐야 할 옛 책들이 조화를 이루며 배치되어 있었다.




전집류도 이렇게 해놓으니 순간 충동 구매가 일 정도였다. 당분간 책 구매를 자제하기로 한 터라 전공 서적이 아니면 참기로 했다. 10여 년 동안 한 달에 10~20만원씩은 꼬박 책값으로 써왔는데 당분간은 학교 도서관을 적극 이용할 것이다. 등록금 본전치기랄까. ㅎㅎ



오광수 선생님의 『한국현대미술사』와 같은 오래된 필독서와 최근에 간행된 윤난지 선생님의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가 함께 있고, 양정무 선생님의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시리즈도 전권 다 있었다(최근엔 5권 르네상스편도 나왔다). 무엇보다 미술사를 좋아하는 한국인이라면 꼭 봐야할 최순우 선생님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도 있는 것을 보며 미술, 디자인 분야에 특히 신경을 썼다는 인상을 받았다.



중국미술사의 개론서도 모두 있고, 불교미술사 필독서도 고루 잘 갖춰놨다. 이런 모습을 보며 나도 미술사 책 새로 나온거 없는지 확인할 겸 이곳에 종종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정도로 신뢰감이 드는 곳이었다.



한쪽 구석엔 디자인 상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봄이 되면 에코백을 다시 꺼내 들리라.



이런 모습보면 안사도 되는데 왜 사게 되는걸까. 연필향이 너무 좋다. 연필향 나는 향수 있으면 하나 사서 매일 방에 뿌리고 싶다.



순간의 스킬을 다룬 책보다 기본을 다룬 책은 사도 결코 후회하지 않게 된다. 간헐적이나마 두고두고 볼 수 있는 생명력이 길기 때문이다. 이 책이 그런지는 안읽어봐서 모르겠지만.



나에게 책과 함께 가장 피하기 어려운 유혹 중 하나는 바로 노트다. 굳이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서점에 가서 문구 코너를 한창 서성이다 오는게 낙이다. 가끔 광화문 교보문고의 핫트랙스 직원들이 '쟤 또 왔어' 이럴까봐 괜히 의식할 정도다. 이는 전적으로 3살부터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날마다 광화문 교보문고를 데려간 부모님 때문이다. 교보문고에서 책을 사고 나와 양손에 부모님 손을 잡고 종로 거리를 걸으며 보던 보도블럭 문양까지 아직 생생하다.



마지막으로 축구 관련 책들도 봤다. 축구는 내 인생의 전부다. 94년 미국 월드컵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유럽 축구는 언제나 내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한때 피파 에이전트가 되는 것도 장래 희망 중 하나였다. 광고대행사에서 3년 정도 일하고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피파 에이전트사 마케팅팀에서 근무를 함으로써 모든 소원까지 다 풀고 공부하러 왔다. 그렇게 해서인지 공부를 하면서도 힘든 학문의 길로 들어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어릴 때 가졌던 모든 꿈을 한 번씩 맛보고 와서인지 '내가 대학원에 안들어오고 취직했더라면 어땠을텐데.'라는 식의 후회가 전혀 안들었다. 중도 포기자가 꽤 많은 이 학문의 길에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만약 우리나라 축구 산업의 파이가 유럽이나 미국처럼, 아니 하다못해 일본만큼이라도 컸더라면 계속 해볼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가끔 한다. 시장 자체가 너무 작다보니 마케팅 전략도 뻔하고, 수준은 낮을 수 밖에 없어 전혀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 덕분에 마찬가지로 파이가 작은 우리나라 미술시장에서의 예술경영, 박물관학에 대한 기대 역시 상당히 낮은 편이다.


3. 아크앤북을 나서며


지금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쓴 것 같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는 모두 아크앤북을 돌아다니면서 했던 생각들이다. 서점이 추구해야 할 길은 이 점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방문하는 모든 이들이 조용히 책을 구경하고, 무엇을 살지 고민하며 각자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들게끔 해주는 역할. 이러한 역할에 서점의 본질이 담겨 있을 것이다. 자주 들릴 것 같은 서점 하나가 또 생겨서 좋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명동에 생겨서.



p.s.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서점 속에 있는 식당에 구매하지 않은 책도 갖고 들어갈 수 있게 한다는 것에 있다. 그건 막아야하지 않을까. 대형 서점들이 그렇게 운영함으로써 생기는 책의 파손을 모두 출판사에 떠넘긴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북카페식 운영이 요즘 트렌드라지만 이건 북카페식 운영이 아니라 비상식적인 운영에 가깝다. 서점이 스스로 책을 함부로 다루는 것이다. 트렌드도 좋지만 적당히 하시길.


댓글 4
  • 태희 2019.01.17 0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옛 사진을 계속 간직하고 계셨네요. 나란히 있으니 그렇구나하고 더 이해가 되어져요. 책에서 나는 종이향과 파란 연필향이 전해집니다.
    그러고보니,, 중국과의 축구가 한창입니다ㅎ

    • 글에서 종이향, 연필향을 느끼셨다니 괜히 뿌듯해지네요. 방금 축구 보면서 한 잔 했는데 이겨서 더 뿌듯합니다. ㅎㅎ

  • 비밀댓글입니다

    • 이니스프리에 카페도 있나보네요. 몰랐어요. ㅎㅎ 한 때 CGV 라이브러리 유명했는데 아직 못가봤네요. 아직 있으려나? 담에 명동갈 때 가봐야겠어요. ^^

스틸북스는 서점인가, 매거진B 판매소인가

2018. 12. 30.


한남동에 새로 오픈한 사운즈한남에 다녀왔다. 사운즈한남은 매거진B를 간행하는 JOH & Company가 기획한 복합문화공간이다. 그래서 곳곳에서 매거진B의 디자인 컨셉을 느낄 수 있다. 처음 스틸북스를 오픈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꽤 기대를 했다. 매거진B를 통해 느낀 명확한 컨셉, 특징이 분명한 서점이 될 것 같았다. 합정의 땡스북스가 이태원에도 생기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아직 자리잡기 전이어서 그런지 이 서점을 매거진B와 같은 회사에서 만든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공간 디자인은 JOH & Company가 늘 그렇듯이 한 눈에 봐도 JOH & Company 작품같았다. 광화문 교보문고 뒤의 D타워도 JOH & Company가 설계했는데 D타워의 축소판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문제는 콘텐츠였다. 서점에서 콘텐츠는 당연히 책이다. 한정된 공간에 책을 얼마나 시의적절하게 배치했는지, 종류는 다양한지 여부가 중요하다. 스틸북스에서 오픈 직전에 북큐레이터를 채용한다는 공고를 본 적이 있었기에 더욱 큰 기대를 했다. 전문가의 시각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서가를 통해 그 시각을 딱히 느낄 수는 없었다. 아래 사진들을 보면 전통적인 책 분류법을 따르기 보다는 서점가에서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컨셉을 정해 책을 분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 공간에 들어가있는 책들인데, 전문가인 북큐레이터(어떤 전문성을 갖춰야 북큐레이터라는 직종이 성립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럽지만 아무튼)가 선정했다기 보다는 그저 다른 서점에서 매대에 올려 놓은 책들을 손에 잡히는대로 가져와서 팔고 있는 인상을 주었다. 참고로 땡스북스는 컨셉이 명확하다. 땡스북스에 가면 교보문고같은 대형 서점에서 찾기 어려운, 그러나 꼭 필요한 책들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방문객에게 언제나 득템의 기회가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주는 곳이 바로 땡스북스다. 물론 그동안 연륜이 쌓였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스틸북스는 갈 길이 먼 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스틸북스의 책들은 이 책들을 사러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근처에 있는 북파크를 추천하고 싶다. 북파크는 책 종류가 많아서 한 번 들어서면 시간가는줄 모르고 책 구경을 하게 된다(북파크는 한강진역 바로 옆에 있다). 스틸북스는 발렛 주차가 가능하지만 굳이 그 복잡한 이태원에 차를 갖고 가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도 아주 불편한 위치에 있다. 지도상으로 이태원역과 한강진역 사이에 있지만 이태원역에서 그나마 가까운 편이다. 하지만 이태원역에서도 엄청 멀다는 점을 미리 알아두는게 좋을 것이다.



1층에 들어서면 매거진B 섹션이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 한 때 매거진B를 사보는걸 즐겨했는데 점점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관심있는 브랜드는 다 나온 느낌이랄까.



매거진B에서 다룬 브랜드 중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LAMY편이 절판되어 그동안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는데 스틸북스에서 드디어 만나볼 수 있었다. 문제는 이제는 내가 LAMY를 안쓴다. 두꺼운 펜촉에 적응하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궁서체를 기반으로 한 내 서체에 두꺼운 필촉은 도저히 맞지 않더라.


매대 한 켠에는 매거진B와 몰스킨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노트를 발매했는데 이 역시 아무런 특징이 없다. 그냥 뒷면에 잉크가 다 번지는 극악의 종이질을 자랑하는 평범한 몰스킨에 불과하다. 띠지에 매거진B CI가 박힌게 특징이라면 특징이랄까. 참고로 난 매거진B 몰스킨편에 나온다. 인터뷰에 응할 정도로 사랑하는 브랜드였지만 종이질에 지쳐버린지 오래다. 몰스킨보다는 로이텀 혹은 로디아 노트를 추천한다.





스틸북스 책 변별력에 가장 실망한 코너가 바로 미술 코너다. 보자마자 '이게 모야... 지금 저 책들을 한국미술사 대표책이라고 내놓았단 말야?'라고 했다는..



안쪽에 있는 책들은 어떤가 싶어서 봤더니만, 아무런 컨셉도 없고, 그렇다고 미술사의 필독서들도 아니며, 신간들도 아니다. 칸딘스키의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열화당에서 무려 2000년에 나온 시리즈 중 하나다. 물론 꼭 읽어야 할 책이긴 하지만 저 책 하나만 갖다 놓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열화당 미술 총서 전체를 갖다 놓았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다. 뒤에 있는 『상인과 미술』도 좋은 책이지만 저자가 그 후에도 좋은 책들을 얼마나 간행했는데 달랑 저 책만 갖다놓다니. 『그림값의 비밀』과 요즘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는 『난생 처음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시리즈는 왜 배치하지 않았을까.



입식 서가에는 이 책들이 있었는데 이 책들을 보고 확신했다. 일단 스틸북스 오픈 날짜에 맞춰 손에 잡히는대로 갖다 놓은 것이라는걸. 스틸북스만의 책에 대한 관점은 언제쯤 생길까? 땡스북스처럼 그곳에 가면 다른 대형서점에는 없지만 반드시 좋은 책을 사올 수 있다는 믿음이 형성되기를 바란다. 미술사책 큐레이팅이 어렵긴 하지만 문외한인 분야는 차라리 자문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은 심플하니 좋다. 딱 JOH & Company스럽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모든 곳에 JOH & Company스러운 디자인을 주입하다보니 슬슬 식상해진다. 선과 선이 유기적으로 교차하며 생기는 모호한 공간이 참 세련되게 보였고, 지금도 멋있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낭비되는 공간이 너무 많다.


라이프스타일이 어떻고, 단순히 책만이 아니라 공간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겠다는 구호를 외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서점은 서점다워야 한다. 사고 싶은 책이 많은 서점이 최고의 서점이다. 일본 츠타야를 염두에 둔 듯하지만 츠타야는 일단 책이 엄청 많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직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 앞으로 어떻게 변모해나갈지 기대도 크지만 무엇보다 기본에 충실하는 서점이 되기를 바란다. 현재로서는 대형서점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네서점도 아닌 어정쩡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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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 김가희 2019.01.02 1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엇보다 서점은 서점다워야한다는 말에 공감입니다 ㅎㅎ 스틸북스 가보고 싶었는데, 이 글을 읽고나니까 머뭇거리게 되네요... 다음에 한남동에 갈 일이 있으면 들르는 정도로 방문해봐야겠어요.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

    •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죠? 스틸북스 갔다가 생각보다 별로여서 실망하고 왔네요. ㅎㅎ 그래도 한 번 가보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함 봅시다 ^^

  • 보나 2019.01.03 2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일하는 분들이 상당히 불친절하다는 인상을 받고 왔습니다. 세련된 구성과 디자인이 돋보일지 몰라도요. 무언가 힙한 기업이 만든 거라는 자부심이 과한 것인지.. 또 가고 싶지 않더군요

    • 그러셨군요. 저도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이상하게 공간이 좀 세련됐다 싶으면 불친절한 경우가 많더군요. 이미지가 영 안좋아지네요.

  • gia 2019.11.22 11: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 상당히 애용하고 있는 서점이라 쓰신 글 보고 조금 놀랐습니다 :) 아마 미술사와 같은 특정 장르에 전문적 식견을 가진 분들이 보기에는 큐레이션에 부족한 점이 많은가 봅니다. 이런 분야에 대해선 언급하신대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콜렉션을 보완하는 노력을 더하면 좋겠네요.
    저는 주로 인문사회서적, 수필, 소설을 읽는 편인데, 진열된 책의 양이 벅차지 않고 제 취향에 맞게 잘 선별되어 있어서 고르기 너무 편하다는 느낌을 매번 받아요. 서점이라기 보다 책이 많은 친구 집 서재 구경하는 느낌이랄까요? "낭비"되는 공간이 많은 것도, 일단 답답하지 않고 그 중 한 공간에 짱박혀 천천히 책을 읽어볼 여유가 있어서 좋다고 느꼈습니다. (의도적인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
    여튼 스틸북스의 좋은 점을 즐기는 사람의 시각도 한 번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좋은 글 계속 올려주세요-

    • 안녕하세요.
      저도 전문 서적 외에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중심으로 볼 때는 좋았습니다. 어느덧 1년이 흘러가는데 그동안 많이 좋아졌으리라 생각해요. 말 나온 김에 오랜만에 함 가봐야겠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

발칙한 현대미술사 / 윌 곰퍼츠, 김세진 옮김

2018. 12. 25.


그간 서양 현대미술 관련 책들을 꽤 봐왔지만 이 책이 가장 쉽게 설명해주고, 재밌는 에피소드도 잘 버무렸다고 생각한다. 저자인 윌 곰퍼츠는 영굳 테이트갤러리 관장 출신으로 현장에서만 얻을 수 있는 깨달음과 지식도 많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주었다.

이 책은 현대미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마르셀 뒤샹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뒤샹이 나올 수 있었던 서양미술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인상주의로 돌아가 차근차근 현대미술을 바라볼 때 필요한 관점을 풍부한 미술사 지식과 함께 설명해준다.

이 책은 그렇게 단숨에 포스트 모더니즘까지 전개해나간다. 마지막으로 뒤샹의 현형으로써 자기 자신을 미술로 승화시킨 아이웨이웨이, 제프 쿤스 등 동시대 작가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책을 읽고 나면 그물망처럼 복잡해보이기만 했던 서양 현대미술이 하나의 실로 느껴지게 될 것이다. 처음 현대미술을 공부할 때 이 책으로 먼저 시작하고 그 다음에 보다 깊이 있는 전공서로 나아가는게 현재로선 최선의 공부방법이 아닐까 싶다.

p.s. 참고로 책의 목차에 미술사조와 연대가 생략되어 있어서 나중에 찾아보기엔 조금 불편하다. 그래서 필기로 덧붙여놨으니 필요하신 분 계심 캡처해뒀다가 사용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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