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의 단상 518

콘텐츠와 미술기법의 완성도

18세기에 활동한 도화서 화원인 변상벽(1730-?)은 영조의 어진을 그릴 정도로 초상화로 실력을 인정받은 화가이다. 도화서 화원이라고 하면 일단은 그 실력이 보장되는 화가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최고여야만 맡을 수 있는 왕의 초상을 그렸다고 하니 프로 중에 프로인 것이다. 변상벽은 이같은 공식 업무 외에 '변 고양이'라는 별명까지 가질 정도로 일생에 걸쳐 고양이 그림을 많이 그린 화가이기도 하다. 왕의 초상과 고양이 그림이라는 화제에서 받는 느낌의 무게감은 서로 너무 다르다. 같은 화가인가 싶을 정도로 하나는 너무 진중한 주제이고, 하나는 일상의 유희에 가깝다. 특히 인스타그램, 유튜브를 통해 소위 '남의 집 고양이'를 보는 즐거움이 가득한 요즘의 눈으로 보니 그 유희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참..

때로는 작품을 직접 만져봐야 알 때도 있다.

전시를 위해 작품을 만지다보면 새로운 힌트를 얻을 때가 종종 있다. 이 작품은 라는 이름의 국보 281호이다. 워낙 완성도도 뛰어나지만 조선 전기에 제작된 수 많은 주자(주전자) 중에서 유일하게 몸체가 병의 형태로 되어 있는 희소성 덕분에 국보로 지정된 작품이다. 전시를 할 때 가장 긴장되고 어지간해서는 만지기 싫은 작품들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였다. 보기에도 갸냘픈 주구(注口)와 손잡이 때문에 포장하는 것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고, 포장을 푸는 것도 가장 천천히 도 닦는 심정으로 해야했기 때문이다. 국보라는 상징성도 긴장에 무게를 더해주었다. 무엇보다 눈으로 볼 때는 잘 모르지만 직접 만져보면 병 하단이 엄청난 두께감과 함께 무거웠다. 즉 이 작품은 실제 사용하기 위해 만든게 아니라 의례를 위한 ..

공예와 미술의 관계

한창 개관 준비로 바쁜 서울공예박물관에 다녀왔다. 요즘 협업을 위해 여러 기관, 기업들을 만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술에서 공예만 떼어다가 이렇게 해도 괜찮은걸까?" 공예의 특장을 살리고 공예문화가 발전하기 위한 노력은 좋으나, 이런 노력들이 오히려 미술로부터 유리되어 가는 미래를 맞이하게 되는건 아닐까라는 우려가 들었다. 미술과 공예의 관계에 대해서 아직 명확하게 개념 정리가 되어 있지는 않다. 앞으로 해결해야될 문제다. 흔히 회화와 조각은 순수미술, 공예와 건축은 응용미술로 보고는 있는데 이 역시 동양화와 서양화의 관계처럼 불분명한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미팅을 마치고 나오며 직장에서의 일을 떠나 공예비평, 논문 등 할게 많다는 생각을 하다가 예전에 우리 교수님이 ..

미술품 물납제에 대하여

"삼성이 상속세를 내야하는 마감일이 다가오자 언론들 총출동" 등의 이야기를 굳이 여기서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사람들이 한 가지 알아줬으면 하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미술품 물납제'의 취지는 불의의 일격으로 세금 폭탄을 맞아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에 있다. 쉽게 예를 들자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남남으로 살아왔는데 알고보니 부모 중의 한 명이 유명한 미술가였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막대한 상속세를 내야하는 상황에 처한 유가족을 배려하고, 동시에 문화유산도 지킬 수 있다는 명분으로 생긴 제도이다. 국가가 예술을 관리하는 프랑스가 대표적인 물납제 적극 시행 국가이다. 법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최소한의 안전 장치로 기능해야 하는데 ..

큐레이터? 프로젝트 매니저?

올 초에 팀을 옮기고 벌써 2개월이 되어간다. 급작스러운 인사발령이었지만, 공예 관련 부서로 옮긴 지금 꽤 만족스럽게 일을 하고 있다. 지난 1월에 이 팀으로 온 뒤로 업무 파악을 위해 지난 결재 문서를 보며 공부하고 업무에 투입되느라 정신없이 연초를 보낸 것 같다. 미술사 중에서 회화사를 전공했고 앞으로도 그럴테지만 호림박물관에서 학예사로 있으며 했던 수많은 도자, 공예 전시를 했기 때문일까. 공예에 대한 매력을 갖고 있던 차였다. 큐레이터도 넓게 봤을 때 프로젝트 매니저 중에 하나이다. 다만 큐레이터에게 프로젝트는 평상시에 하는 유물 관련 일을 제외하고 전시기획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권한과 책임이 좁다는 느낌을 박물관에 있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조금 더 넓고 큰 프로젝트를 맡으려면 큐레..

박물관및미술관진흥법 일부 개정 법률안에 대하여

오늘 황당한 소식을 접했다. 배현진 의원이 '박물관자료'의 대출이나 열람서비스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 대출 및 열람 서비스 제공을 막고 있기에 국민들이 이를 누릴 수 있도록 일부 개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아. 박물관의 도서관에 있는 도록, 해외논문집을 의미하나보다'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박물관의 도서관에서는 열람은 가능해도 대출은 할 수 없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불편할 때가 있어 가능하게 되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개정안을 읽어보니 배현진 의원실 측에서 '박물관자료 = 유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박물관및미술관진흥법」 제2조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3. “박물관자료”란 박물관이 수집ㆍ관리ㆍ보존ㆍ조사ㆍ연구ㆍ전시하는 역사ㆍ고고ㆍ인..

[전시] 10의 n승 / 문화역서울284 TMO

작품을 가로 10cm, 세로 10cm라는 한계를 정해둔채 제작한 작품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 주에 이어 서울역 한 켠에서는 또 다른 전시가 개최되었다. 며칠 전부터 오며가며 준비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고 오픈하는 날인 오늘을 기다렸다. 이라는 전시 제목과 모든 작품을 일괄적으로 가로, 세로 10cm에 맞추려는 의도가 신선했다. 오늘 출근해서 바로 전시를 보러 갔는데 작은 공간 안에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작품들 덕분에 오랜만에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공간에 들어서면 작은 캔버스들이 마치 아트페어에서 새로운 컬렉터를 기다리듯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작은 아트페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캔버스는 가로 10cm, 세로 10cm로 한 손으로 쥘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작다. 작가들이 이..

팀을 옮겼다.

일을 하다가 가끔 전시실을 둘러보곤 한다.휴관 중이어서 딱히 체크해야할 작품들은 없지만공간 자체가 문화유산(사적)이기 때문에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불까지 꺼져있어 고요한 전시실은 더 매력있다. 이곳으로 이직하고 어느덧 1년이 흘렀다.작년 1월에 산 조그만 달력이 벌써 한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그동안 월요일부터 표기된 이 달력 때문에 꽤 헷갈려했는데1년동안 잘 버텼다.다음에 살 때는 반드시 일요일부터 써있는 달력인지 확인해야겠다. 새해를 맞아 대대적인 인사발령이 났다.나는 본원에 위치한 공예 관련 부서로 옮기게 되었다.최근 3개월동안 많은 고민을 했었는데 이번 인사발령과 함께어느 정도 고민이 해결되어 다행이다. 새 팀에서 나는 공예주간이라는 행사와 해외 아트페어를 맡게 되었다.전 박물관에서..

큐레이터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

오랜만이네요. 블로그는 미디어의 지형이 변해가는 것과 상관없이 언제나 꾸준히 나의 생각을 전하고, 쓰고 싶은 글을 남기는 공간으로 남기고 싶은 곳인데 꾸준함이 참 어렵다는걸 새삼 느끼는 요즘입니다. 가끔씩 제 블로그를 들러보는 분들이 계시는 것으로 압니다. 말은 못해도 항상 죄송하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_ _) 한 번 흐름이 끊기니 글을 쓰고 싶다가도 스스로에 대한 검열 때문에 머뭇거리게 되던 참이었는데 마침 그동안 저에게 질문을 해주신 분들이 꽤 계셔서 이 핑계로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Q. 큐레이터가 전시기획만 하는 게 아니라 이외의 부수적인 업무들을 겸해야 한다던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어려움은 없으신지 궁금해요. A. 을 할 때 항상 강조하던 부분이었습니다. 전시를 기획하는 일만 보고 큐레이터를..

옥션 대표의 위엄

당연한 말이지만 내 주변에는 연구자들이 많다. 같은 전공인 미술사 전공자들과 가장 친하게 지내고 있다. 직업군으로 분류하자면 당연히 각 박물관, 미술관의 학예사들이 많고, 이외에도 문화재청 선생님들, 젊은 교수님들과 같이 스터디를 하고 술자리를 종종 가지며 친하게 지내고 있다. 이렇게 연구자들 외에 교분을 나누는 사람들 중에는 대학원, 박물관 업무 등을 통해 알게 된 미술품 매매업 대표(대개 고미술상이라고 부른다. 부르기 쉬운 공식 명칭이 생겼으면 좋겠다), 경매회사 대표도 있다. 이들 중 한 분은 내 고등학교, 대학원 선배(대학원에 입학해서 처음 뵈었는데 알고 보니 고등학교도 선후배 관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인데 내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언제나 나를 응원해주신다. 나로서는 매번 감사한 마음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