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클럽

[리뷰] 영혼의 미술관

2023-02-01
조회수 647

일정 : 11/28(월)-12/23(금)

지난 연말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을 함께 읽고 단체 카카오톡방에서 단상을 나눴던 이야기 중에 좋았던 내용을 소개합니다. 책을 함께 읽고 이를 주제로 소소한 대화의 시간이 무척 좋았습니다. 다른 관점을 통해 책을 보다 입체적으로 읽는 장점도 있고요. 첫 북클럽에 참여해주셨던 분들 모두 감사했습니다 :)


                                  


"어떤 예술작품을 성공적이라고 말할 때, 그 작품은 가치 있지만 붙잡아두기 어려운 요소들을 전경에 내놓는다."(p. 11)

앙리 마티스의 <춤 2, (1909)>을 이제서야 꼼꼼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림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은 이 행성이 고민거리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도 않고 "모든 게 좋다고 말하지 않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항상 서로의 존재로부터...그물같은 결속력을 유지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p. 13)

저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역동적이긴 한데 차갑다'고 생각했어요. 손을 잡고 있는데 따뜻하지 않다고 할까요. 그래서 내 삶 속 '우리들'의 손잡음이 아니라 무용수들의 손잡음이라 생각했었고 그래서 꽤 건조한 아름다움이라 생각했었습니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마치 무용수의 공연을 보고 있는 기분 같은 거요. 그래서 제 머릿 속에는 이 그림이 '파랗고 붉은 토양색들의 움직임' 이라는 인상으로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게 되더라고요. 이 글 덕분에. 그렇게 시선을 보게 되고 꽉 잡은 손과 잡진 않았는데 손끝은 닿은 그런 손 잡음도 보게 되고... 저는 "둘 다 왜곡과 목적성이 있다"(p. 13)는  예로 든 조지 그로스의 <사회의 기둥들>나, 앙겔리카 카우프만의 <회화를 안는 시> 그 극단의 방식엔 그닥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지나친 염세도 지나친 낭만도 끌리지 않아요. 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은, 앙리마티스의 <춤 2>정도겠구나 생각해봅니다. '그럼에도' 보다 나아질 것을 기대할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현실에서  적당히 껄끄럽고 적당히 친절한 관계들 속의 우리들 안에 잠재돼 있다는 것을 믿는 희망. 이 정도요.

기억파트의 <미술의 기원: 양치기의 그림자를 더듬어가는 디부타데스>와 관련한 내용을 보며 식물분재를 하시는 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식물이 성장하는 순간 순간을 담고 싶어 그 식물의 그림자를 수묵화로 그리기 시작하셨다는 내용인데요. 읽고나서 회화의 효용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미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방식이며, 우리 주변에는 일시적이고 아름다운 경험이 많은데, 그런 경험을 마음에 담으려면 도움이 필요하다.”(p. 11) 

이 부분을 읽으며 사진에 관해 생각해봤어요. 이 역할을 지금에 와서는 사진이 잘 해내주고 있지만 사진은 마음에 담긴 감정이나 인상을 재현해주기는 부족한 것 같고, 창작 과정에서 창작자가 고치거나 다듬을 수 있는 여지가 많은 미술이 좋은 도구가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희망파트에서 마티스에 그림을 보며 우리는 역시 옆사람과 다르지 않고 많은 감정들을 공유하며 살아간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림속에서 흔히 우리가 ‘긍정적’이라고 말하는 친절함, 즐거움, 천진무구함 모두 저희 안에 그런 모습이 이미 있고 그림은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할뿐이라는 생각도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존재의 현실적 추함을 더 견디기 어렵게 만든다.”(p. 17)라는 부분에 첨언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현실이 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부분은 늘 우리안에 있다” 이렇게요!

“우리는 이상적 이미지를 일반적인 현실의 잘못된 묘사로 간주하지 않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p. 20) 

이상화나 희화화 모두 심각하게 접근하지 않고 가볍게 생각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책에서 나온대로 동기를 꿰뚫어보는 약간의 통찰이 있다는 가정하에요.

"예술은 왜 우리에게 중요한가? 그가 건네주는 답은 결정적이다. 예술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을 성취할 수 있다. 즉, 사랑하는 대상이 떠난 후에도 계속 그 대상을 붙잡아둘 수 있다."(p. 8)

이어지는 문장에 사진을 예시로 들고 있는데 사진이 예술범주에 포함되기 전에 논쟁이 있었다고 알고 있어서 이 문장을 읽으면서 예술의 범주에 편입되기까지 과정을 더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미술은 복잡성을 자르고 다듬어, 비록 간략하지만 가장 의미있는 양상들에 집중하게 해준다."(p. 11-12) 

저번주에 환기미술관과 국제갤러리에서 전시를 보고 왔었는데 이 문장을 읽고 나니 한번 더 보러가고 싶어졌어요. 저는 전시관람을 좋아하는데 왜 좋아하는지를 물으면 속 시원하게 대답하진 못했었거든요. 그에 대한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문장이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희망의 부재가 결정할 수 있다. … 그리고 세상의 고민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를 들깨우는 탓에 우리는 우리의 희망적인 성향을 지켜낼 도구가 필요하다."(p. 13)

오늘 읽은 내용중에서 가장 강하게 (마침표를 세개나 찍어주며) 공감한 문장입니다. 평소 음악도 영화도 미술도 유독 쾌활하고 즐겁고 예쁜 콘텐츠를 편애하는 성향을 갖고있어요. “내 감성을 다치게 할것 같은 콘텐츠를을 굳이 보고 들으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대략 이렇게 이유를 설명하곤 했는데,

 ‘희망’이라는 챕터에서 이 문장으로 정리되는 글을 쭉 읽어내려오면서 뭔가 저의 ‘증상’을 정제된 단어로 정리한 처방을 받은 느낌이랄까. 희망을 지켜낼 도구로서의 예술을 저는 추구하나봅니다! ㅎㅎ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 신철규 시, <유빙> - 

오늘 읽은 부분은 이 싯귀와 꽤 잘 들어맞는다 싶습니다. 

"우리의 인성 중 잃어버린 부분을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역할"(p. 29)을 하기도 하고 "우리를 보다 도덕적으로 만들어주기"(p. 32)도 하는 그 예술이 우리 각자의 고유한 열정을 자극하기에 "예술은 사람마다 매우 다른 의미를 띠기 마련"(p. 29)이라는 말에서요. 

오늘 읽은 부분은 작품이 한 개인에게 갖는 의미가 뭔가도 생각해보게 되고, 오랫동안 회자되는 작품은 왜 그러한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더불어, 예술이 "우리의 시간을, 삶을 구원하는"(p. 38) 역할을 한다고 할 때 그 근거가 될, 작가의 치열한 고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고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느끼게, 잘 포장된 무언가의 껍질을 한꺼풀 벗겨서 날것으로 다시 응시해보도록 만들기 위한 그 고민을요. 

"'정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릴케의 시 따위를 도대체 왜 읽어야 한다는 말인가?' 나의 오랜 대답은 이렇다. '왜냐하면 삶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순간에만 겨우 그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 265 - 

"해마다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을 때 흔히 느끼는 것은 저 '기본'에 대한 심사숙고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아쉬움이다. 시인이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제 무능한 언어를 학대한 흔적이 없고, 언어가 시인의 통제를 벗어나 날뛴 축제의 흔적이 없다. 시인과 언어가 이렇게 서로 사이가 좋아도 되는가."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 295 -

덕분에 책장에 꽂힌 책들을 다시 소환해서 읽어봅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여기에 있다" 2010년 MOMA에서 열린 회고전 에서의 그 행위예술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보게 됐어요. 리처드 세라의 <페르난두 페소아>라는 작품이요. 덕분에 아브라나모비치의 그 작품이 갖는 의미를 더 많이 생각해보게도 되네요. 'Artist  is  present'라는 작품명은 곧 "존엄을 지키려 할 때 도움이 필요하다면, 예술은 우리가 그런 경험을 사회적으로 표출해주도록 해주기 위해 우리 곁에 존재한다"(p. 25)와도 닿아 있는 듯하고요.

예술이라고 일컫는 우리는 당신의 슬픔을 분석하지 않지만, 그것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감정임을 그저 바라보게 해주고 싶다. 혹여 똑바로 응시하는 일조차 어렵게 느껴진다면 같이 바라봐줄 사람이(혹은 무언가가) 곁에 있다고 말없이 지지해주고 있다. 뭐 그런거요.

“세라의 작품은 우리의 고민을 부인하지도, 우리에게 기운을 내라고도 말해주지 읺는다. 다만 슬픔은 애당초 인생의 계약서에 적혀 있다고 알려준다.“(p. 24) 이 부분을 읽으며 요즘 저의 화두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좋은 감정만 취하려고 하고, 좋지 않은 감정은 피하려고 하는데요. 이 부분을 읽고나서 부정적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감정도 온전히 겪어내는 연습을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올해 여름에 고모가 돌아가셨는데, 그 소식을 들은 지인분이 슬픔이 충분히 머물다 가게 하라고 하시더군요. 나중에 빚받으러 온다고요. 그말도 생각나네요!

균형회복 파트는 많은 공감을 하며 읽었는데요. 한달전쯤 침실에 잔잔한 호수 사진을 걸고 싶었어요. 책에 나온 말처럼 마음깊숙이 가라앉은 평화로운 면들을 일으켜 세울 용도로 말이죠. 전세집이 못 하나 더 박는게 찝찝해서 그만 뒀지만요. 다른 이의 취향도 더 존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도 같습니다. 

달항아리가 가치 있는 이유는 어떤 의미부여도 소화하는 능력에 있는 듯 합니다. 오늘 책을 읽고 작품을 집에 들여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생겨서 좋네요.

"우리의 틀에박힌 일상은 대체로 우리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일깨우지 않으며, 예술계가 찌르고 치근대고  좋은 의미로 도발할 때까지 내처 겨울잠을 잔다."(p. 52) 

"관람자가 어떤 종류의 예술을 이해하는 능력을 쌓으려면 누군가가 관람자의 경험 중 아주 취약한 부분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p. 50) 

"과민한 방어 체계는 궁핍함을 낳는다."(p. 41)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점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p. 53) 

"그(피카소)는 벨라스케스 앞에서도 자신을 유지하고 있다."(p. 52)

예술계, 이질적인 작품, 좀처럼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어떤 시대의 (흔히들 명작이라 하는데 왜 명작일까 나만 또 무지해서 공감이 안 되는건가 싶은) 작품들.  이 낱말들이 들어간 자리에 저는 '사춘기라는 감정의 회오리 속에 있는 중딩 남학생'을 넣어보게 되더라고요. 어제까지 겪다 이제사 좀 놓여난 감정이라 그런가봅니다 😅

이들의 공통점은 이래요. 

1. 내처 겨울잠을 자던 내 의식을 확! 흔들어 깨우는 존재이다.

2. 내 경험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1년에 꼭 한 명씩 손을 내밀며 나타난다. 

3. 매해 겪을 때마다 첫반응은 과민한 방어체계를 작동시켜 궁핍해지는 나 스스로를 바라보게 한다. 

4. 이질적인 그와 나의 공통점 하나를 가까스로 발견한 후에야 우리의 실체 없는 감정적 싸움의 결과는 각자의 성장으로 나아간다.

5. 매번 다른 양상의 사춘기 아이들 앞에서도 내가 나와 그의 고유한 본성을 존중하며 서 있을 때에야 우리 서로가 진실한 마음을 교류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보면 예술은, 작품은 살아있는 유기체구나 싶기도 하네요.  인지할 틈도 없이 즉각적으로 감정이나 신체가 어떤 형태로 반응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그게 수용일 때도 그렇고 거부일 때도 결국 "왜?"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들어주는 듯해요. 훔. 그러고보니 꽤나 역동적이었네요. 작품과 저의 눈맞춤은. 눈맞음은.

"그림은 우리의 인간관계나, 일상의 스트레스와 고난을 직접 가리키지 않는다. 이 그림의 기능은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의 거대함을 날카롭게 의식하는 심리 상태를 일깨우는 것이다."(p. 27)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효율만을 중시하지 않는 것. 목표로 한 걸음에 내달리지 않는다는 점이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것을 잃어버리진 않았으므로, 예술이 균형을 회복시켜 주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열정을 자극한다고 해도 예술은 사람마다 매우 다른 의미를 띠기 마련이다."(p. 31)

"취향 뒤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기제를 이해한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의 미적 감각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그 기제를 이해하면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단순히 얕보고 비방하는 행동을 멈출 수 있다."(p. 32)

"우리는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알지 못한다. 우리에겐 직관, 의혹, 유감, 모호한 공상, 이상하게 뒤섞인 감정이 있으며, 이 모두는 단순명료한 판단을 방해한다. 여러 기분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이따금 예전에 느꼈지만 명확히 알지 못했던 어떤 것을 정확히 파악한 듯 보이는 예술작품들과 우연히 마주친다."(p. 39)

책의 문장들을 읽다보면 전시를 더 열심히 보러 다니고 싶어지더라고요. 이번에 읽은 문장도 전시장으로 등을 밀어주는 글이었습니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의 경우 우리는 그것들과 약간 닮아 있다. 그런 오브제들은 자기 자신을 알게 하고, 타인에게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더 많이 알릴 수 있게 하는 매개체다."(p. 44)

"상대방을 재평가하고 다시 갈망하게 되는 법을 고려할때, 예술가들이 익숙한 것을 다시 보는 방법을 관찰하면 본받을 점을 얻을 수 있다."(p. 118)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그림과 함께 오늘 읽었던 챕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에요📖

"좁은 관점에서 보자면 데이비드의 저술은 피자 반죽이나 오징어 튀김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더 깊은 주제는 영양적 결핍때문에  남부의 가치를 망각한  듯 보이는 북부의  독자들을 일깨우기 위해 남부의 가치를 찬양하는 데 있었다."(p. 128)

저는 그림이나 조각,건축물들을 볼때 나의 끌림과 호기김에 심리적 결핍이 내재되어 있을 수 있다는것에 크게 공감이 되었네요.. 마음이 필요한 무언가를 바깥으로 찾아 나서는 여정이었던가요~~^^ 

"괴테,니체,코널리 같은 사람들에게 남부는 행복이었다.하지만 장기간  체류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문제는 남부 지방에서 찾은  충족감을 일부라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데 있다.북부로 돌아왔을 때 남부의 가치들을 어떻게 내 것으로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그 답은 이 책에서 자주 언급했듯이, 경험을 간직하고 전달하는 최고의 수단, 바로 예술에 있다."(p. 130)

제가  전시회를 가고 여행을 하면서 꼭 챙겨야 할 경험을 간직하고 싶어서 그리 기념품가게를 서성인다는 것을 알게 되는 구절이네요, 명확하게도~~ㅎ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미래를 더 사실적으로 느낀다고 볼 수 있다 기다릴 줄 아는 능력...만족을 지연시켰던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 모습과 더 사실적이고 밀접함 관계를 맺고 있었고 시간을 그려볼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예술은 우리가 이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도와준다."(p. 136)

"...현재는 무가치해지지 않고 오히려 그 가치가 증가한다. 진정으로 가치있는 노력에 우리의 삶을 바칠 필요가 좀더 분명해지고 현재 이 순간 더욱 확실해지고 강력해진다"(p. 138)

"인간 경험의 한 기본적 특징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내면으로부터 알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반면 타인은 단지 외적으로 만난다, 누군가를 가깝게 느끼고 잘 알게 될 수도 있지만 간극은 항상 남는다...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반드시 자신에게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우리 마음이 그렇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결과다...우리는 자신의 삶을 특별하게 느낄 수 있지만 삶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p. 140)

저는 현재를 살아가고 집중할 필요와 가치, 현재와 미래와의 연계성, 역사의 반복과 타인의 입장에 내가 서보는 경험같은 내용의 서술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자기계발서같은 해석이긴 해도 역사는 다시 되풀이되고 알고도 막지 못하는 인간의 무기력 그럼에도 시간은 지나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지난 챕터인 사랑에서 섹스와 미덕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 없이 섹스를 허락해도 더 높은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가치들을 굳건히 지탱할 수 있다는 것, 인간 본성을 보다 통합적으로 보는 감각-정서적 친밀, 에로틱한 흥분, 안정된 가정생활-을 이끌어내 수 있가 최고의 사랑이란 바로 육체와 정신의 조화이며 우리의 호르몬은 성애와 도덕적 찬탄이 한곳에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는 구절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재밌네요, 그건 제가 아무래도 플라토닉한 사랑의 관점에서 성적 욕구를 호르몬 작용으로 취급하는 것에 익숙하기도 하고요. 한편 통합적인 감각과 최고의 사랑같은 것은 생의 한 가운데에서 니나와 같은 감수성과 강인함이 요구되는 부단히 쉽지 않은 작업이란 생각도 합니다.

"삶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p. 141)

"랄프왈도 에머슨은 우리에게 선입견 없이 우리의 영혼에 미의 다른 형식들도 알아볼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라고 권유했다."(p. 145)

저는 삼청동길을 좋아합니다. 그냥 그 길을 걷는 것만도 좋고, 뜬금없이 아무 가게나 갤러리에 들어가서 노는 재미도 있어요. 어떤 전시를 봐야지~하고 전시장에 들렀다가 시간이 어중띄게 남으면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마주하게 되는 작품들이 어떤 때는 더 큰 울림을 주기도 해요. 미의 다른 형식들도 마련하는 여지를 스스로에게 주기란 쉬운 일이 아닌듯해요 제게는. 결국은 끌리는 것만 찾아가서 보곤 하니까요.

나는 어떻게 다른 여지를 주려고 하더라? 돌이켜보면, 제가 끌려서 방문한 전시장의 주변을 그냥  동네 마실 온 듯 (사실 낯선길에 대한 약간의 소심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는데도) 마냥 걸어보는 일 같아요. 그러다 그냥 한 번 다른 갤러리에 기웃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또 다른 작가님의 작품들을 만나는 행운을 얻기도 하고요. 

그러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하시나... 관심 두지 않던 류의 작품들과는 어떻게 만나시나 싶어요.  ^^

"현대 예술가들의 힘든 과제는 근대적인 풍경의 매력에 우리가 눈뜨도록 하는 것이며, 근대적 풍경의 특징은 단연 공학과 산업에 있다. 처음에는 급수탑, 고속도로, 조선소에 아름다울 게 어디 있느냐고 항의하고 싶은 충동이 들지만, 한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예술가들은 한때 순결하고 숭고한 자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최전선에서 우리를 도왔듯이, 근대적 풍경의 특이한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일에도 앞장서왔다."(p. 145)

전에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했던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사진전을 그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채로 보았는데요. 그의 많은 사진들이 이번 챕터에서 소개하고 있는 아름다움을 주제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나니 더 재밌게 읽었습니다.

"관능은 촉감과 움직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즐기는 것이다."(p. 109)

저번에도 느꼈는데 이 책은 단어의 정의가 신선한데 딱 와닿는다는 생각을 했어요. 움직이고 감각을 느끼는 과정을 그저 즐길 수 있으면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따라서 합리적인 사람은 쉽게 화내지 않고, 속단하지 않는다."(p. 110)

많이 공감했어요. 저도 반응하기 전에 여유를 허락하고, 여러 방면으로 사고하는 사람을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인간관계에서 단단하고 건설적인 주체가 되려면 이성이 필요하다는 것. 정확한 사고, 신중한 주장, 명확한 설명, 여러 요소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p. 111)

인간관계에서 감정은 관계를 시작하는 데에 동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면 지속하기 위해선 이성이 필요하겠네요. 또 이성이 필요하다는 걸 항상 잊지 않는 노력까지!

이성파트를 읽으면서 오늘 오전에 들은 정재승교수님 말씀이 떠올랐어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를 많이 내는 이유에 관한 주제였는데요. 우리 뇌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데요. 그래서 부모님, 연인을 ‘나’로 인식해서 통제하고 싶어하고, 자기 뜻대로 안되는 걸 용납하기 힘들어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깊은 관계일수록 감정적으로 반응하기보단 개별적인 존재로 재인식하고 합리적으로 관계를 이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전체적 관점 파트에서 푸생의 인생관에 공감해요. 고통이 기본값이 되면 일상의 편안함은 기적이 되잖아요. 가끔 저도 이런 생각을 종종하며 일상을 버틸때가 많습니다. 고통의 보편성 또한 항상 상기하면서 지내는 편입니다. 누구나 고통을 겪고 나에게만 일어나는 비운이 아니라는 것. 고통이 나의 정체성이 되면 피해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으니까요.

"따분해져 버린 것에 대한 우리의 열정을 되살리는 능력은 위대한 예술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런 작품들은 이미 익숙해져서 간과하기 쉬운, 경험의 감춰진 매력을 일깨운다. 그런 작품을 찬찬히 보다보면 감상하는 능력에 다시 불이 붙는다."(p. 118)

실제로 이런 작품을 주의 깊게 보다보면 일상속에 사소한 것들도 새롭게 다가와요. 아침에 일어나서 집안 환기를 하거나 가볍게 차 한잔을 하더라고 온전히 감각하고 행동하면 참 새롭더라고요. 다만 여유와 섬세함이 필요했습니다.

"라파엘로와 리드의 도움 덕분에 햅워스를 사랑할 줄 알게 되었다.(p. 163)

"허버트 리드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 까지 40년이 걸렸다. (수많은 저서와 수차례 강연에도 불구하고 ) 그가 어렵사리 해낸 일은 영국 사회의 아주 적은 인구가 미술관의 일부 작품을 보다 호의적으로 보게 된 정도였다. 그러나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p. 167)

저는 우정아교수님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하신 동시대미술 강의 덕분에 행위예술을 의미있게 바라볼 줄 알게 됐습니다. ㅎㅎ 사실 제게 행위예술이란 어린날 TV만화영화에서 영심이가 왕경태 앞에서 행위예술이라고 하고는 기괴한 소리를 내던 것이 첫 기억이었어요.

재작년인가 국현에서 진행된 꽤 유명한 작가님의 행위예술을 관람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같이 간 지인은 뭔가 다 알아듣고 감동한 눈빛이었는데 저는 '저 행위의 의미가 뭘까...' 만 생각하고는 또 나만 모르지 싶어 위축되기도 하고 뭐 그런저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다 아브라다모비치, 아이웨이웨이, 프란시스 알리스, 다니엘 노어 등등의 작가분들의 작품에 대한 안내를 받았고 물질로 남지 않는 예술작품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의 경우 역시, 한 미술사가의 오랜 연구의 결과가 겨우 관람자의 한 사람인 미미한 제게   "아!"  한마디의 감탄사를 내뱉게 하고는 그 영향력이 끝났다고 볼 수도 있겠죠. 그럼에도 "그러나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는 167쪽의 문장은 제게도 꽤 큰 격려가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 제 삶에 영향을 끼쳐왔을거예요. 저같이 미술계 종사자가 아닌 이들이  형성할, 어떤 또다른 건강한 안목을 지니기 위해 노력하는 집단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겠죠. ㅎㅎ

"캉브르메르 부인-사실은 많은 사람들-은 예술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믿을만한 경험에 기초해 평가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생각하고 느끼기 위해 수고해본 적이 없고, 다소 공황 상태에서 단지 현재 이럴 것이라고 상상하는 유행을 모방하는 정도에 불과하다."(p. 162)

미술사 공부를 시작하고, 어쩌면 지금까지 저에게도 이런 태도가 있었습니다. 궁구하고 사유하는 시간을 귀찮아했거든요. 하지만 저는 유행의 모방을 폄훼하고 싶지 않고, 쉽게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모방을 취향 삼았다 해도 그 시절의 취향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입장이고요. 개취존이란 말도 있듯이 모두의 취향은 존중받기 충분한 것 같아요. 취향은 고상해야만 할 것 같고, 나는 남보다 좋은 취향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때문에 섣불리 취향을 드러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스스로 취향을 정립하는 것도 어려워 진다고 느껴요.

"근본적으로 비평가의 임무는 어떤 대상을 볼 때 무엇이 진정으로 만족스럽고 즐거운지, 또는 무엇이 실망스럽고 설익었는지 파악하게 하는 데 있다."(p. 165)

책에서 말하는 좋은 비평가를 몇분 알고 싶네요. 추천받습니다🙏🏻 사실 제가 예전에 자주 접했던 비평가들은 인지도가 있어서 그런지 따라오는 후광효과가 불편했던 경험도 있어서요.

"추하게 구색을 맞춰놓은 건물과 마주하거나 망가지고 깨진 지하철역을 지나야할 때도 우리는 조반니 벨리니의 <목초지의 성모>를 감상할 때와 동일한 사람이다.(p. 219)

"검열의 의미는 관심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공적인 승인을 거부하는 데 있다."(p. 220)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예술이 덜 필요하고 덜 예외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다."(p. 228)

미술관에 가서 관람료를 지불하고 작품 앞에 서는 나나 집을 나서 일터로 가는 길에 마주하는 수많은 건물, 보도블럭, 간판들을 보는 나는 같은 사람이지. 그런데 왜 길에서 마주하다 불편해보이는 것들엔 왜 그렇게 관대했을까.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의미도 알 수 없고 생뚱맞게 환경정화?시책의 일환으로 칠해진 알록달록한 벽화 그리고 한 번 칠해지고 나면 보수 한 번 하지 않아 엉망이 되어가는 그 그림들. 기껏 잘 지어놓고 덕지덕지 간판으로 외관을 훼손시켜버리는 일들 등등. 내 알 바 아니지 싶었나 싶기도 하고 나의 무심한 묵인이 또다른 공적 승인을  낳았던 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하림씨의 글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선동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이 흐르는 이들의 손을 잡은 것이라는 말에 꽤 많이 공감했어요. 예술도 공부도 결국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그것을 지지대 삼아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꾸려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지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된 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