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일)
<아트앤팁 일본 답사> 3일차인 12월 4일(일)은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이데미쓰미술관, 산토리미술관에 다녀왔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관람하면서 옆에 위치해있던 국립공예관도 가려 했으나 2020년에 이시카와현(石川県)으로 이전하여 볼 수 없었다. 그 전까지는 40여 년동안 공예관이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의 분관으로, 바로 옆에 있어 함께 볼 수 있었는데 아쉽게 됐다.
전날 인파로 북적이던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전투적으로(?) 작품을 보느라 꽤 힘이 들었던 터라 이 날은 특히 기대가 컸다. 일요일임에도 경험상 관람객이 많지 않을 거라 예상했고 모처럼 쉬는 기분으로 작품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됐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일본인들 역시 ‘국보전’, ‘무슨무슨 보물전’, ‘거장전’과 같은 블록버스터 전시를 여전히 좋아한다. 덕분에 이 날 본 평범한 일상같은 상설전은 상대적으로 발길이 뜸했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도 특별전을 같이 하고 있었지만, 이것 대신 상설전을 택한 이유는 일본의 근대미술사를 시대순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화단은 본격적으로 서양회화와의 절충을 시도하였다. 이를 주도한 이는 공교롭게도 일본인이 아니라 미국인 어니스트 페놀로사(Ernest Francisco Fenollosa, 1853-1908)였다. 그는 도쿄제국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무조건적인 서양미술의 도입보다는 기존 일본회화의 전통을 살리면서 서양회화를 절충하는 방향으로 화단을 이론적으로 주도해나갔다.
특히 그는 400여 년동안 전문화가 그룹으로서 일본 화단을 지배해온 가노파의 회화에 주목했다. 가장 일본스러운 회화였기 때문이다. 가노 호가이(狩野芳崖, 1828-1888)는 가노파 출신으로 페놀로사에게 배운 후 가노파의 선명한 화풍에 서양식 명암법과 화사한 색감을 더했다. 이후 프랑스, 이탈리아 등으로 유학을 다녀온 화가들에 의해 서양회화가 미술계의 한 축으로 온전히 자리잡게 되었다.
일본의 서양회화 유입에 대해 공부하며 일본 미술의 다양성에 대해 놀랄 때가 많았다. 일본이 처음 서양미술을 접한 때는 16세기로 일본에 선교를 위해 건너간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일본 화단에서는 남화와 같은 전통 수묵화가 유행하는 한편, 시바 고칸(司馬江漢, 1747-1818) 등 서양화법도 유행하였고 이 때 취득한 서양화법의 사생을 회화에 접목하였다. 일본의 근대 서양화는 이렇게 서양회화에 대한 이해와 활용이 내재된 상태에서 발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리학이라는 국가이념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조선시대 미술과 전개 양상이 달랐다. 물론 서양미술이 발전의 상징이 당연히 아니기에 이를 두고 우열을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각자의 특징이 다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신 특징으로 구분해야 한다. ‘일본 근대미술의 특징은 무엇인가’, ‘어떤 전개 과정을 거쳤는가’, ‘우리와 뭐가 다른가’. 이 의문들을 품은 채 산책하듯 전시를 봤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상설전을 볼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차례로 내려오면서 보게 된다. 이 전시실은 그 중간에 있는 곳으로 화이트큐브형으로만 이루어진 다른 전시실에 비해 가장 특색있는 공간이다. ‘일본화’를 소개하고 있다. 아마 이 미술관이 자랑하는 장소일 것 같다.
가노 호가이(狩野芳崖), <벚꽃나무 아래 용구도(桜下勇駒図)>, 1884,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이 작품은 가노 호가이가 페놀로사에게 그림을 처음 배우던 시기의 것으로 기존 가노파 회화의 형식적인 묘사에서 보다 생동감 있는 자세와 볼륨감있는 말의 형태가 특징이다. 다만 많은 것이 생략된 배경에 사선 방향으로 벚나무와 말을 배치한 것은 중세부터 이어져온 야마토에의 전통으로 볼 수 있다.
와다 산조(和田三造), <남풍(南風)>, 1907,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일본미술사 개설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근대미술의 대표작이다. 와다 산조는 1927년에 색의 표준화를 위해 일본표준색협회를 창립하여 1951년에 일본 최초로 종합표준색표인 『색의 표준』을 완성한 인물이다. 이 작품은 19세 때 표류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며 제1회 문부성미술전람회에서 서양화 부문 최고상을 수상했다. 극도로 이상화된 인체와 대칭이 아닌 구도에서 서양의 낭만주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면 빛에 반사된 색의 표현은 대상의 고유색이 아니라 햇빛을 다분히 의식한 흔적이 보여 당시 유행했던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요로즈 데쓰고로(萬鉄五郎), <나체미인(裸体美人)>, 1912,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이 작품은 일본 근대미술사 책에 늘 서두에 등장할 정도로 일본 근대(다이쇼 시대) 서양화단의 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풀잎과 꽃 표현에서는 반 고흐, 평면적으로 처리한 진한 빨간색의 바지와 초록색 풀잎의 보색 대비에서는 마티스의 영향을 받았다. 작가 스스로도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거기에 과장된 몸짓을 하고 있는 인체 표현은 이 작품의 개성을 잘 보여준다. 1912년에 이미 이런 그림을 그렸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다른 전시실에서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가 수용될 당시의 전시 아카이브를 볼 수 있었다. 《추상과 환상》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1953년에 개최한 적이 있는데 당시의 포스터, TV 방송, 그리고 3D 스캔으로 꾸민 당시의 전시실을 구경할 수 있다. 이때가 되면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한 흐름으로 가게 된다. 우리나라도 1950년대에 미국을 통해 유입된 추상표현주의가 미술계의 가장 큰 화두가 되었다. 1960년대에 전위미술로 넘어가는 것도 비슷하다.
《추상과 환상》 포스터, 1953, 도쿄국립근대미술관
플레이 스테이션 조이스틱으로 조종해가며 구경하는 당시의 전시실
『미술수첩』 78호(1954)에 소개된 《추상과 환상》 전시 관련 기고문
가와바타 미노루(川端実), <리듬>, 1958,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스에마쓰 마사키(末松正樹), <프로방스에서(들판)>, 1955, 도쿄국립근대미술관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앞 거리
저 멀리 보이는 빨간 벽돌 건물이 본래는 분관으로서 공예관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폐쇄된 상태다. 근대 건축물 안에서 보는 공예 전시가 꽤 인상깊었는데 아쉽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전시실 옆에 바깥 풍경을 감상하는 휴게실이 있다.
휴게실에서 바라본 풍경
앞에 보이는 강처럼 보이는 물은 성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해자다. 나무로 우거진 곳은 일왕이 사는 ‘고쿄(皇居)’다. 고쿄가 있어서 주변이 조용하고 치안도 당연히 잘 돼있다. 주말이면 사람들은 이곳으로 나와 산책과 조깅을 즐긴다.
‘고쿄(皇居)’ 주변 거리
이데미쓰미술관
이데미쓰미술관에 가는 길. 도쿄역 뒷편 광장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여의도 같은 거리로, 상당히 이국적인 거리 풍경을 갖고 있다. 가족, 연인과 함께 주말 데이트를 하러 나오는 곳 중 하나다.
석사논문의 주제로 삼았던 에도시대 화가 다노무라 지쿠덴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던 기관 중 한 곳이다. 덕분에 석사논문을 쓸 때 가장 많이 들락거렸고, 당시 관장님의 도움을 받은 인연이 있는 미술관이다.
이데미쓰미술관의 《서로 끌리는 미와 창조》 특별전
이 전시는 동서미술 교류의 상징인 17세기 도자기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단체 관람을 안받고 있고, 예약도 1인당 2장까지만 받고 있다. 그리고 사전에 꼭 일시 지정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안가려고 했으나 혹시 몰라 시간대를 구분하여 1인당 2장씩 예약은 해놨다. 마침 시간 여유가 생겨서 이 전시를 보기로 했다. 대신 들어가서는 절대 서로 아는 체도 안하기로 약속하고 한 팀씩 올라가서 보고 왔다.
이데미쓰미술관의 휴게실
이곳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마련해놨다. 본래는 전시실을 포함하여 이곳도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으나 경비를 서고 계신 분이 내가 촬영하는 것을 보고도 제지하진 않았다. 그냥 봐준 건지, 아님 이곳은 허용하는 것으로 변경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데미쓰미술관의 휴게실에서 바라 본 풍경
산토리미술관
3층에 산토리미술관이 있는 도쿄 미드타운 내부
하세가와 도하쿠(長谷川等伯), <송림도병풍>, 16세기, 6폭 1쌍, 도쿄국립박물관
기념 엽서 : 하세가와 도하쿠, <풍도(楓圖)>, 16세기, 지샤쿠인(智積院)
산토리미술관에서는 교토 지샤쿠인(智積院)의 보물을 소개하는 특별전을 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대표작은 <송림도병풍>으로 유명한 하세가와 도하쿠의 금병풍이다. 지샤쿠인(智積院)의 여러 보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작품이다. 하세가와 도하쿠는 <송림도병풍>을 그렸을 즈음에 4장짜리 후스마에(襖絵)로 <풍도>를 그렸다. 후스마에는 어두운 실내를 화사하게 밝혀주는 건축 요소로 제작되어 금지, 은지를 사용했으며 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 유행했다.
이 작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아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절인 쇼운샤(祥雲寺)에 설치하기 위해 의뢰한 작품으로 거대한 단풍나무를 클로즈업하고 화려한 단풍잎과 꽃을 금지 바탕에 그려 아주 화려하다. 실제로 보니 그 스케일과 색감, 그리고 치밀한 구성력에 압도당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찬찬히 살펴 보니 필선은 평범했다. 서예를 잘 쓰는 사람의 필선이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훗날 쇼운샤가 폐사되면서 지샤쿠인(智積院)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소장되고 있다고 한다.
도쿄 미드타운에서 바라본 풍경. 스케이트장과 코카콜라 프로모션 행사장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난다.
긴자 거리
산토리미술관을 마지막으로 자유시간이어서 긴자로 넘어왔다.
일본의 대표적인 문구점 <itoya>
나의 목적지는 긴자에 있는 대형 문구점, <itoya>였다. 도쿄에 올 때마다 들르는데 여기에 오면 함께온 일행들이 이제 좀 나가자며 늘 나를 끄집어 낼 정도로 사고 싶은 것도 많고, 구경거리도 많았다. 항상 문구류를 많이 사갔다. 이번에도 한국에서 찾기 힘들었던 노트를 사러 왔다.
내가 정한 기준은 심플한 커버일 것, 검정색일 것, 펜 거치 홀더가 있을 것, 속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얇을 것이었다. 분명 우리보다 종류가 다양한 곳이기에 당연히 깐깐한 내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무엇보다 당혹스러웠던 것은 이 외에 사고 싶은 게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이럴수가.
노트와 펜 등 문구류에 진심을 담아 마치 작품을 다루듯 하는 나인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이렇게 세울 수 있는 종이 엽서도 좋아하는데 딱히 사고 싶은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itoya>를 나와 호텔로 가는 길에 곰곰이 생각하며 그동안 취향의 변화가 생겨서 그런 것은 아닐까라고 나름 결론을 내렸다.
실제 그랬다. 예전에는 펜의 종류도 다양하게 쓰고, 노트도 정확히 일본식 세밀한 구성의 노트를 즐겨 써왔다. 얼마 전부터는 그냥 조그만 로이텀 노트, 노란색의 리걸 패드 노트, 그리고 펜은 막 쓸 수 있는 파커 볼펜을 주로 쓰고 있다. 겨우 몇 년 사이에 생긴 취향의 변화가 소비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우연히 체험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음에 일본에 가면 들르긴 또 들러볼 것이다.
쇼핑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쇼핑을 마치니 막상 내일 떠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래서 자유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이번 답사 일행분들에게 긴급 공지를 보내서 8시 30분까지 이케부쿠로역 야키니쿠집에서 모이자고 했다. 그렇게 마지막 날 밤에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편의점에서 각자 커피를 산 뒤 헤어졌다. 술자리에서의 풍경, 편의점에서 각자 먹을 커피, 간식을 고르며 즐거워하던 풍경 모두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2016년에 긴자 <Itoya>에서 사온 종이 엽서. 책장 한 켠에 늘 있었는데 지금 보니 사라져있다. 어디 간 거니.
<itoya> 내부 종이 섹션. 다양성 면에서는 핫트랙스를 확실히 능가한다.
이케부쿠로 역 근처에 있는 호텔.
12/4(일)
<아트앤팁 일본 답사> 3일차인 12월 4일(일)은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이데미쓰미술관, 산토리미술관에 다녀왔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관람하면서 옆에 위치해있던 국립공예관도 가려 했으나 2020년에 이시카와현(石川県)으로 이전하여 볼 수 없었다. 그 전까지는 40여 년동안 공예관이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의 분관으로, 바로 옆에 있어 함께 볼 수 있었는데 아쉽게 됐다.
전날 인파로 북적이던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전투적으로(?) 작품을 보느라 꽤 힘이 들었던 터라 이 날은 특히 기대가 컸다. 일요일임에도 경험상 관람객이 많지 않을 거라 예상했고 모처럼 쉬는 기분으로 작품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됐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일본인들 역시 ‘국보전’, ‘무슨무슨 보물전’, ‘거장전’과 같은 블록버스터 전시를 여전히 좋아한다. 덕분에 이 날 본 평범한 일상같은 상설전은 상대적으로 발길이 뜸했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도 특별전을 같이 하고 있었지만, 이것 대신 상설전을 택한 이유는 일본의 근대미술사를 시대순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화단은 본격적으로 서양회화와의 절충을 시도하였다. 이를 주도한 이는 공교롭게도 일본인이 아니라 미국인 어니스트 페놀로사(Ernest Francisco Fenollosa, 1853-1908)였다. 그는 도쿄제국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무조건적인 서양미술의 도입보다는 기존 일본회화의 전통을 살리면서 서양회화를 절충하는 방향으로 화단을 이론적으로 주도해나갔다.
특히 그는 400여 년동안 전문화가 그룹으로서 일본 화단을 지배해온 가노파의 회화에 주목했다. 가장 일본스러운 회화였기 때문이다. 가노 호가이(狩野芳崖, 1828-1888)는 가노파 출신으로 페놀로사에게 배운 후 가노파의 선명한 화풍에 서양식 명암법과 화사한 색감을 더했다. 이후 프랑스, 이탈리아 등으로 유학을 다녀온 화가들에 의해 서양회화가 미술계의 한 축으로 온전히 자리잡게 되었다.
일본의 서양회화 유입에 대해 공부하며 일본 미술의 다양성에 대해 놀랄 때가 많았다. 일본이 처음 서양미술을 접한 때는 16세기로 일본에 선교를 위해 건너간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일본 화단에서는 남화와 같은 전통 수묵화가 유행하는 한편, 시바 고칸(司馬江漢, 1747-1818) 등 서양화법도 유행하였고 이 때 취득한 서양화법의 사생을 회화에 접목하였다. 일본의 근대 서양화는 이렇게 서양회화에 대한 이해와 활용이 내재된 상태에서 발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리학이라는 국가이념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조선시대 미술과 전개 양상이 달랐다. 물론 서양미술이 발전의 상징이 당연히 아니기에 이를 두고 우열을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각자의 특징이 다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신 특징으로 구분해야 한다. ‘일본 근대미술의 특징은 무엇인가’, ‘어떤 전개 과정을 거쳤는가’, ‘우리와 뭐가 다른가’. 이 의문들을 품은 채 산책하듯 전시를 봤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상설전을 볼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차례로 내려오면서 보게 된다. 이 전시실은 그 중간에 있는 곳으로 화이트큐브형으로만 이루어진 다른 전시실에 비해 가장 특색있는 공간이다. ‘일본화’를 소개하고 있다. 아마 이 미술관이 자랑하는 장소일 것 같다.
가노 호가이(狩野芳崖), <벚꽃나무 아래 용구도(桜下勇駒図)>, 1884,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이 작품은 가노 호가이가 페놀로사에게 그림을 처음 배우던 시기의 것으로 기존 가노파 회화의 형식적인 묘사에서 보다 생동감 있는 자세와 볼륨감있는 말의 형태가 특징이다. 다만 많은 것이 생략된 배경에 사선 방향으로 벚나무와 말을 배치한 것은 중세부터 이어져온 야마토에의 전통으로 볼 수 있다.
와다 산조(和田三造), <남풍(南風)>, 1907,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일본미술사 개설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근대미술의 대표작이다. 와다 산조는 1927년에 색의 표준화를 위해 일본표준색협회를 창립하여 1951년에 일본 최초로 종합표준색표인 『색의 표준』을 완성한 인물이다. 이 작품은 19세 때 표류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며 제1회 문부성미술전람회에서 서양화 부문 최고상을 수상했다. 극도로 이상화된 인체와 대칭이 아닌 구도에서 서양의 낭만주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면 빛에 반사된 색의 표현은 대상의 고유색이 아니라 햇빛을 다분히 의식한 흔적이 보여 당시 유행했던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요로즈 데쓰고로(萬鉄五郎), <나체미인(裸体美人)>, 1912,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이 작품은 일본 근대미술사 책에 늘 서두에 등장할 정도로 일본 근대(다이쇼 시대) 서양화단의 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풀잎과 꽃 표현에서는 반 고흐, 평면적으로 처리한 진한 빨간색의 바지와 초록색 풀잎의 보색 대비에서는 마티스의 영향을 받았다. 작가 스스로도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거기에 과장된 몸짓을 하고 있는 인체 표현은 이 작품의 개성을 잘 보여준다. 1912년에 이미 이런 그림을 그렸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다른 전시실에서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가 수용될 당시의 전시 아카이브를 볼 수 있었다. 《추상과 환상》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1953년에 개최한 적이 있는데 당시의 포스터, TV 방송, 그리고 3D 스캔으로 꾸민 당시의 전시실을 구경할 수 있다. 이때가 되면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한 흐름으로 가게 된다. 우리나라도 1950년대에 미국을 통해 유입된 추상표현주의가 미술계의 가장 큰 화두가 되었다. 1960년대에 전위미술로 넘어가는 것도 비슷하다.
《추상과 환상》 포스터, 1953, 도쿄국립근대미술관
플레이 스테이션 조이스틱으로 조종해가며 구경하는 당시의 전시실
『미술수첩』 78호(1954)에 소개된 《추상과 환상》 전시 관련 기고문
가와바타 미노루(川端実), <리듬>, 1958,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스에마쓰 마사키(末松正樹), <프로방스에서(들판)>, 1955, 도쿄국립근대미술관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앞 거리
저 멀리 보이는 빨간 벽돌 건물이 본래는 분관으로서 공예관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폐쇄된 상태다. 근대 건축물 안에서 보는 공예 전시가 꽤 인상깊었는데 아쉽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전시실 옆에 바깥 풍경을 감상하는 휴게실이 있다.
휴게실에서 바라본 풍경
앞에 보이는 강처럼 보이는 물은 성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해자다. 나무로 우거진 곳은 일왕이 사는 ‘고쿄(皇居)’다. 고쿄가 있어서 주변이 조용하고 치안도 당연히 잘 돼있다. 주말이면 사람들은 이곳으로 나와 산책과 조깅을 즐긴다.
‘고쿄(皇居)’ 주변 거리
이데미쓰미술관
이데미쓰미술관에 가는 길. 도쿄역 뒷편 광장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여의도 같은 거리로, 상당히 이국적인 거리 풍경을 갖고 있다. 가족, 연인과 함께 주말 데이트를 하러 나오는 곳 중 하나다.
석사논문의 주제로 삼았던 에도시대 화가 다노무라 지쿠덴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던 기관 중 한 곳이다. 덕분에 석사논문을 쓸 때 가장 많이 들락거렸고, 당시 관장님의 도움을 받은 인연이 있는 미술관이다.
이데미쓰미술관의 《서로 끌리는 미와 창조》 특별전
이 전시는 동서미술 교류의 상징인 17세기 도자기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단체 관람을 안받고 있고, 예약도 1인당 2장까지만 받고 있다. 그리고 사전에 꼭 일시 지정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안가려고 했으나 혹시 몰라 시간대를 구분하여 1인당 2장씩 예약은 해놨다. 마침 시간 여유가 생겨서 이 전시를 보기로 했다. 대신 들어가서는 절대 서로 아는 체도 안하기로 약속하고 한 팀씩 올라가서 보고 왔다.
이데미쓰미술관의 휴게실
이곳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마련해놨다. 본래는 전시실을 포함하여 이곳도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으나 경비를 서고 계신 분이 내가 촬영하는 것을 보고도 제지하진 않았다. 그냥 봐준 건지, 아님 이곳은 허용하는 것으로 변경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데미쓰미술관의 휴게실에서 바라 본 풍경
산토리미술관
3층에 산토리미술관이 있는 도쿄 미드타운 내부
하세가와 도하쿠(長谷川等伯), <송림도병풍>, 16세기, 6폭 1쌍, 도쿄국립박물관
기념 엽서 : 하세가와 도하쿠, <풍도(楓圖)>, 16세기, 지샤쿠인(智積院)
산토리미술관에서는 교토 지샤쿠인(智積院)의 보물을 소개하는 특별전을 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대표작은 <송림도병풍>으로 유명한 하세가와 도하쿠의 금병풍이다. 지샤쿠인(智積院)의 여러 보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작품이다. 하세가와 도하쿠는 <송림도병풍>을 그렸을 즈음에 4장짜리 후스마에(襖絵)로 <풍도>를 그렸다. 후스마에는 어두운 실내를 화사하게 밝혀주는 건축 요소로 제작되어 금지, 은지를 사용했으며 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 유행했다.
이 작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아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절인 쇼운샤(祥雲寺)에 설치하기 위해 의뢰한 작품으로 거대한 단풍나무를 클로즈업하고 화려한 단풍잎과 꽃을 금지 바탕에 그려 아주 화려하다. 실제로 보니 그 스케일과 색감, 그리고 치밀한 구성력에 압도당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찬찬히 살펴 보니 필선은 평범했다. 서예를 잘 쓰는 사람의 필선이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훗날 쇼운샤가 폐사되면서 지샤쿠인(智積院)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소장되고 있다고 한다.
도쿄 미드타운에서 바라본 풍경. 스케이트장과 코카콜라 프로모션 행사장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난다.
긴자 거리
산토리미술관을 마지막으로 자유시간이어서 긴자로 넘어왔다.
일본의 대표적인 문구점 <itoya>
나의 목적지는 긴자에 있는 대형 문구점, <itoya>였다. 도쿄에 올 때마다 들르는데 여기에 오면 함께온 일행들이 이제 좀 나가자며 늘 나를 끄집어 낼 정도로 사고 싶은 것도 많고, 구경거리도 많았다. 항상 문구류를 많이 사갔다. 이번에도 한국에서 찾기 힘들었던 노트를 사러 왔다.
내가 정한 기준은 심플한 커버일 것, 검정색일 것, 펜 거치 홀더가 있을 것, 속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얇을 것이었다. 분명 우리보다 종류가 다양한 곳이기에 당연히 깐깐한 내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무엇보다 당혹스러웠던 것은 이 외에 사고 싶은 게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이럴수가.
노트와 펜 등 문구류에 진심을 담아 마치 작품을 다루듯 하는 나인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이렇게 세울 수 있는 종이 엽서도 좋아하는데 딱히 사고 싶은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itoya>를 나와 호텔로 가는 길에 곰곰이 생각하며 그동안 취향의 변화가 생겨서 그런 것은 아닐까라고 나름 결론을 내렸다.
실제 그랬다. 예전에는 펜의 종류도 다양하게 쓰고, 노트도 정확히 일본식 세밀한 구성의 노트를 즐겨 써왔다. 얼마 전부터는 그냥 조그만 로이텀 노트, 노란색의 리걸 패드 노트, 그리고 펜은 막 쓸 수 있는 파커 볼펜을 주로 쓰고 있다. 겨우 몇 년 사이에 생긴 취향의 변화가 소비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우연히 체험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음에 일본에 가면 들르긴 또 들러볼 것이다.
쇼핑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쇼핑을 마치니 막상 내일 떠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래서 자유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이번 답사 일행분들에게 긴급 공지를 보내서 8시 30분까지 이케부쿠로역 야키니쿠집에서 모이자고 했다. 그렇게 마지막 날 밤에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편의점에서 각자 커피를 산 뒤 헤어졌다. 술자리에서의 풍경, 편의점에서 각자 먹을 커피, 간식을 고르며 즐거워하던 풍경 모두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2016년에 긴자 <Itoya>에서 사온 종이 엽서. 책장 한 켠에 늘 있었는데 지금 보니 사라져있다. 어디 간 거니.
<itoya> 내부 종이 섹션. 다양성 면에서는 핫트랙스를 확실히 능가한다.
이케부쿠로 역 근처에 있는 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