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s]질문 없는 시대의 응급상황(written by 이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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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주, <ER>, 2019, 순지 위에 먹과 분채, 94x62cm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왜 저렇게 돈도 안 되고 쓸모없는 일을 하는지 궁금해한다. 소비지향 사회의 물건의 가치는 쓸모가 없으면 버려지고 순식간에 신상품으로 바뀌고 쓰레기는 그 이면(裏面)을 채운다. 이런 신상사회(新商社會)에서 인간으로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쓸모 있음’을 늘 증명하면서 버려지지 않기 위한 고독한 싸움이며 불안의 연속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가끔 길을 잃는다. 그래서 이 작품은 작가로 살아가기 위한 나의 정체성과 동시에 예술의 존재 이유를 물어보는 질문의 행위이다.

우리는 ‘무얼 향해 어디로 가고 있나? 아름다움은 존재하는가?’ 내면에서 반추된 질문이 중력처럼 끌어당기던 시기에 그려진 <ER>은 2019년 완성된 작품이다. 질문 없는 시대의 응급상황에 대해 주변의 버려지기 직전의 정물들을 소재로 그려진 한국 수묵담채 정물화이다. 

형태적으로는 먹다 버린 포도송이와 숙성된 바나나, 물관에서 물이 다 빠진 마른 꽃이 제1주제로 그려졌고, 그 주위로 달빛처럼 광배가 둘러싸고 중앙에는 <ER>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ER은 ‘emergency’의 약자이다. 질문 없는 시대의 응급상황을 말하고 있다. 정물들 아래에는 솔잎과 잔 나뭇가지의 가늘고 짧은 선들로 덩어리진 더미를 그려 넣었다. 

숙성된 바나나의 노란색과 덩어리는 정신성의 응축된 강조이며, 먹다 버린 포도송이는 사회적 자아의 상실감의 표현이고 물이 다 빠진 마른 꽃은 젊지 않은 육체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 밑을 받치고 있는 솔잎과 잔가지 더미는 이 사물들이 겪은 수많은 시간과 공간의 역사성을 상징한다. 정물 주위로 속도감 있는 붓의 필치로 원형의 광배를 그려 사물들을 중앙으로 집중시키며 강조하였고, 회전하며 돌고 있는 듯한 기시감과 착시효과로 주었다.

제2주제는 상단 왼쪽에 산처럼 한 무더기의 또 다른 더미로 나뭇가지에 초승달(New Moon)을 그렸다. 그 더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텅 빈 남루한 집 한 채가 그려져 있고 지게를 진 노인이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제1주제가 현실을 살아 낸 치열한 세계라면 제2주제는 현실과 이상의 중간 단계이다. 제2주제에는 아직은 등에 빈 지게를 짊어진 노인의 엉거주춤한 세계관이 드러난다. 쇠잔하고 낡은 육체를 껴안고 현실을 등지고 자유를 향해 떠나는 조금은 불투명한 세계이다.

제3주제는 상단의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전선과 희미한 산의 형상으로 이질적이며 희미한 세계이다. 제3주제는 모호하지만 눈을 들어 어딘가로 향하고 있으며 끊어질 듯 이어진 경계 너머의 무언가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제1, 제2, 제3의 주제로 구성된 <ER>작품의 전체 화면구성은 정물과 사물에 빗대어진 인생과 세계관이 들어 있다.

<ER>작품은 한국의 순지를 사용해 반수(아교포수)를 하고 그 위에 먹으로 1차 드로잉을 한 후, 드로잉된 부분에 먹의 농담(담먹, 중간먹, 농먹 등)과 물바림을 이용해 음영과 깊이감을 주어 2차 작업을 하였다. 3차로 분채(가루물감)와 안채(고형물감)를 사용해 담채 기법과 물바림 기법으로 채색을 한 수묵담채 정물화 그림이다. 정물 부분은 세필(가는 붓)을 이용한 공필화 기법을 사용하였고 더미 부분에는 바탕에 음영을 주어 더미를 쌓아 올리는 음각기법을 사용하였다. 우리나라 수묵담채 정물화의 기원은 19세기 오원 장승업의 기명절지도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진채 형식의 문방도나 책가도와는 달리 수묵화의 기법을 사용한 문인화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ER>작품도 먹의 농담을 이용하여 1차 드로잉을 하였기 때문에 수묵담채 정물화의 형식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기명절지도는 중국 고대의 청동기와 화병 등 진기한 물건이나 사대부들이 애장하는 물건들을 주로 그려 넣었다. 그러나 <ER> 작품은 전통의 소재에서 벗어나 쓸모를 다하고 버려지기 직전의 정물에서 찾아낸 조형적 형태미와 사물에 체화된 정신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 작품도 다른 작품에서처럼 체화된 감각이 녹아 있는데 여기에서는 쓸모를 다한 사물들을 바라보는 물건에 체화된 시선의 시각화를 다루었다. 버려지기 전, 남아 있는 형태 속에서 잔존 하는 아름다움을 더 찾아내어 ‘쓸모없음의 쓸모있음(無用之用)’을 사물에 투사하였다. 독일의 사회학자 아도르노는 예술이 지닌 ‘비사회적 기능’과 ‘무 기능성’이야말로 예술의 기능임을 강조하며 ‘예술은 사회에서 눈엣가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그 사회에서 쓸모를 드러내는 행위임을 역설하였다. 이 작품과 나의 예술 행위도 이런 맥락과 함께하고 있다.


written by 이범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