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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미술사 이야기

한류, 믿음을 통하다. 通信使

by 아르뜨 2011. 11. 2.

한류, 믿음을 통하다. 通信使

비록 5분 이내의 방송 분량이긴 하지만, 'EBS의 역사채널e'는 꾸준히 볼만한 프로인 것 같습니다. 부담없이 시사, 역사 등에 관한 상식을 얻을 수 있고 짧은 시간동안 감동을 주기도 하죠. 역사스페셜과 같은 프로도 좋지만 사실 매주 챙겨보는건 무리일 때가 있어서 역사 상식을 섭취(?)하고픈 분들은 이 프로를 추천하고 싶네요. ㅎㅎ

이번 주제는 <한류, 믿음을 통하다. 통신사>입니다. 한류의 인기가 욘사마 때의 1차 한류보다 더 높아지고 저변화 되어가고 있는 요즘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은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감상해보세요. ^^



통신사가 매년 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 백성들에게는 평생 한번 볼까말까 할 구경거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 오면 엄청난 인파가 모여들었다고 하네요.


다시 봐도 방송 프로의 제목을 참 잘 지은듯 합니다. 카피라이팅의 힘이 느껴지네요. ㅎㅎ

임진왜란 이전부터 왜구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었고, 또 임진왜란으로 대대적으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감정상으로는 '불구대천의 원수'같이 여겨졌겠지만, 실제로 더 골치 아팠던건 전쟁 사후 처리 문제였다는군요. 포로 문제, 국토 복구 문제, 재정 등등... 그 중에서도 포로를 되찾아오는 문제는 수십년간 조정에서 깔끔하게 해결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측은 일본의 새 집권자로 등극하였고, 정부(막부)를 천황이 있는 교토가 아니라 자신의 본래 근거지였던 에도(동경)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권력이 자리잡기 전까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추종하는 지방의 영주(다이묘)들이 곳곳에 잔재해 있었기 때문에 권력 안정 차원에서 (얼굴에 철판깔고) 조선에 화친을 요청합니다. 이 점만 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굉장히 정치적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죠.

도쿠가와의 일본에서 화친을 요청하자 조선의 조정은 의견이 분분했다고 합니다. 들어줘야 한다, 절대 들어주지 말아야 한다로 나뉘어서요. 하지만 포로를 데리고 와야 하는 대의도 걸려있었고, 일본 군사력의 강성함을 제대로 맛본 조정에서는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수시로 정탐해야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직후의 통신사는 본래 명칭이 통신사가 아니라 '회답겸쇄환사'였습니다. 즉, 일본측 화친 요정에 대한 '회답'을 주는 동시에 '포로를 되찾아오는' 사절단이라는 뜻입니다. 이 명칭 문제 가지고도 조정에서 엄청나게 싸웠다고 하네요.(정치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 명칭에 나라의 자존심이 걸려있었기 때문이죠. 화친 요청에 기다렸다는듯이 덥썩 오케이 해주기는 모양새가 안나고... 이에 대한 고민은 이해가 가긴 합니다. ㅎㅎ


 

보통 '조선통신사'하면 임진왜란 이후만 생각하곤 하는데, 사실 조선 초기부터 공식 사절단은 존재했었습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문에 중단되었던 거죠. 그리고 조선통신사, 조선통신사라고 하는데, 본래는 잘못된 명칭입니다.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입장에서 바라본 명칭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일본통신사'가 올바른 명칭이죠. 하지만 워낙 고유명사처럼 자주 쓰였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그냥 '조선통신사'라고 합니다.

요즘도 저 루트로 여행하면 엄청 힘들텐데, 당시로서는 죽음의 여행길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어요. 그래서 통신사절단으로 선발된 관원들은 배에 오르기 전에 모두 유서를 작성하고 출발했다고 합니다. 청나라로 가는 연행사도 마찬가지였구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당시 국가간 역학관계를 생각해보면 왠지 청나라 '연행사'로 선발되는건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을 듯 하고(마치 요즘 주미 대사로 임명받는 것처럼), 일본 '통신사'로 선발되면 '아놔....-.-;;;' 이랬을 것 같아요. ㅎㅎ


일본의 조정, 그러니까 막부측에서는 머리를 정말 잘 쓴게 저렇게 많은 비용을 대면서 조선 통신사로 인해 권력의 안정화를 꾀했지만, 재밌는건 저 비용을 막부에서 전부 지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 통신사가 에도로 들어오는 경로에 위치한 지방 영주들에게 비용을 대라고 강요했었죠. 오사카를 지나갈때는 오사카의 영주가 돈내기... 이렇게요. ㅎㅎ 그래도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면서 생기는 정치적 이득이 엄청났기 때문에 궁시렁대면서도 조선통신사 맞이에 열심히 임했다고 하네요.




한일관계를 전공으로 하는 역사학자, 미술사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서 한국 문화가 일본에게 끼친 영향, 반대로 일본에 받은 영향에 대해서 집대성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일본 우익들이 헛소리하지 않게요.

김명국은 당시 조선의 유명한 화원이었는데, <달마도>같은 그의 화풍이 일본에서는 아주 선풍적인 인기였다고 합니다. 기록에 보면 김명국이 '일본인들의 그림 주문이 너무 많아서 밤을 새어가며 그리고 있는데 팔이 아파서 울고 싶을 정도다' 라고 나와있을 정도였죠. 당시 통신사는 체계적으로 임무를 나누어서 갔기 때문에 각자의 소임이 있었습니다. 화원의 경우는 그림 요청이 들어오면 그려주는 역할이었고, 동시에 일본의 지형을 그려오는 임무도 가지고 있었죠. 따라서 그림 요청이 들어왔는데 안그려주면 그것은 임무 수행을 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김명국이 일본에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그 후에도 일본에서는 조선에 통신사절단을 요청할 때 '꼭 김명국을 데리고 와달라. 아니면 김명국같이 그림 잘 그리는 화원을 데리고 와달라'라고 했다는군요. 조선에서는 김명국이 나이가 많음을 핑계로 깔끔하게 거절했다고 합니다. ㅎㅎ



사진에 나와있는 조엄은 11차 통신사의 최고 책임자였습니다. 그가 일본을 다녀오며 남긴 기록이 '해사일기'인데, 일본인들이 조선의 서예를 얼마나 좋아했으면, 조선통신사의 최하급 관리나 시중드는 소년에게도 글씨를 써달라고까지 했답니다. '시중드는 아이에게 글씨를 얻고서는 무척 좋아하며 돌아가더라' 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죠.

 

아메노모리 호슈는 주자학파의 유학자인 동시에 외교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통신사와 일본인들은 대화를 나눌 때 양쪽 모두 한문을 사용할줄 알았기 때문에 필담으로 나눴는데, 아메노모리 호슈는 우리나라 말에도 능했습니다. 심지어 조선어 교과서도 집필할 정도였다고 하니 유학자로도 유명하지만, 외교관으로서도 아주 좋은 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죠.



이렇게 활발하게 진행된 통신사는 1811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됩니다. 그 이유는 막대한 경비 지출에 따른 재정난도 있었고(당시 일본이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농민 봉기가 자주 일어났거든요), 이후 제국주의 침략에 사상적 근간이 된 '정한론'이 대두되며 '우리가 왜 우리보다 못한 조선을 맞이해야하고, 또 돈까지 낭비해야하느냐'라는 주장이 계속 거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811년 통신사도 에도까지 못오게 하고, 쓰시마(대마도)에서 서로 문서 교환하고 그냥 끝냈습니다. 조선과의 교역이 있어야지만 경제적으로 숨통을 트일 수 있었던 쓰시마 영주는 아주 애간장이 탔다고 합니다. ㅎㅎ

요즘 가만히 보면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은 대부분 일본의 우익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근데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어쨌든 일본 내에서는 우익이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관심 없다고 합니다. 물론 저런 소수가 백년전 제국주의, 군국주의와 같이 무서운 집단화를 만드는 것처럼 항상 예의주시하고, 적절하게 대응을 해야겠지요. 항상 경계하고 의심하되, 동등한 입장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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