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직업적 정체성

2021. 7. 3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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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정리하다가 10여 년 전 석사논문을 쓸 때 공부했던 제본과 A4용지 뭉치가 나왔다.

또 고질병이 도졌다.

'이걸 버려야하나. 아니야 분명 나중에 필요할 때가 있을거야. 아닌가.'

사람을 한 단어로 규정한다는게 참 어리석은 일이지만, 최소한 직업적 정체성에는 깔때기를 들이대도 괜찮지 않을까. 그 깔때기에는 어릴 때의 꿈,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경제력 등이 혼재되어 있지만 결국 그 아래로 흘러나오는 것은 이중 하나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꿈은 역사학자이다. 그리고 역사라는 학문에 여러 갈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이왕이면 아름다운 것을 다루는 미술사학자가 되고 싶었다. 이 꿈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문헌을 찾아 해석하고, 작품을 분석하여 여러 층위로 구분하고 나의 생각을 최대한 논리에 맞게 정리하는 일을 하고 싶다. 자구(字句)에 집착하고, 붓의 흔적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살면 예전 처음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처럼 복마전같은 세상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을 받으며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의 직업적 깔때기는 학자, 연구자가 나와야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고민이 많아진다.

사람들과의 만남은 최대한 좁힌채 공부만 하며 살고 싶다가도 내 커리어의 시작이 그래서인지 기획일도 참 재밌다.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전략을 세워 여러 사람들과 만나 설득과 협의를 통해 어떤 무언가를 완성해나가는 일도 좋아한다는게 아직도 나를 사춘기에 머무도록 잡아둔다. 어떤 일을 할 때 예산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하고 예산을 분배하는게 기획의 가장 중요한 단계일텐데 이 과정 또한 좋아한다.

전시실과 수장고에 갇힌채 유물을 조용히 보고 다루거나 서재에서 논문에 파묻혀 지내며 논문을 쓰는게 좋다가도 때로는 박물관을 벗어나 더 큰 프로젝트를 수행해나가는 것에 아드레날린이 슬며시 배어 나오기도 한다.

20대 때 40대를 바라보며 고민하고 계획을 세우며 살아왔다. 이제는 50대의 내 모습이 어떨지, 진짜 행복해하고 있을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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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뜨 큐레이터의 단상/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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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희

    다양한 면으로 발현하고 있으십니다.
    그런 면이 상호보완 되기도 해보이고 호환되어져 보이기도 해요.
    응원을 보냅니다~~.

  2. 그렇겠죠? 학자와 기획자를 구분하는 분위기라 고민스럽긴 하지만 결국 제가 좋아하는걸 하다보면 해결되리라 믿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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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E

    실제로 교육중이신 강의 같은거 있으면 정보좀 안내해주세요.

  4. 아마 코로나가 끝나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하게 되면 공지할께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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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E

    안끝날것 같은데, 평생 못보는거 아닌가요...
    시간좀 내주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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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입니다

  7. 잘 지내시죠? 수업 이후에도 우연히 한 번씩 마주쳤는데 코로나 이후에는 한 번도 못뵈었네요. ㅎㅎ 요즘 블로그가 뜸한데 이렇게 잊지 않고 와주고 추억에 잠길만한 글도 남겨주시고 감사합니다. 읽다가 찡했네요. ㅎㅎ 저도 일단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만 머지 않은 시간에 나와서 자유롭게 강의도 하고, 글도 쓰고, 공부도 하며 지내리라 생각해요. 요즘같은 때에 쉽지는 않겠지만 되돌아보면 강의할 때가 가장 행복했거든요. 남겨주신 글이 큰 격려가 되어줍니다. 감사해요. 무더위, 코로나 모두 조심하시고 조만간 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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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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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범경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