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작품을 직접 만져봐야 알 때도 있다.

2021. 4. 26.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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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주자>, 15세기, h. 29.0cm, 국보 281호, 호림박물관 소장


전시를 위해 작품을 만지다보면 새로운 힌트를 얻을 때가 종종 있다. 이 작품은 <백자주자>라는 이름의 국보 281호이다. 워낙 완성도도 뛰어나지만 조선 전기에 제작된 수 많은 주자(주전자) 중에서 유일하게 몸체가 병의 형태로 되어 있는 희소성 덕분에 국보로 지정된 작품이다.

전시를 할 때 가장 긴장되고 어지간해서는 만지기 싫은 작품들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였다. 보기에도 갸냘픈 주구(注口)와 손잡이 때문에 포장하는 것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고, 포장을 푸는 것도 가장 천천히 도 닦는 심정으로 해야했기 때문이다. 국보라는 상징성도 긴장에 무게를 더해주었다.

무엇보다 눈으로 볼 때는 잘 모르지만 직접 만져보면 병 하단이 엄청난 두께감과 함께 무거웠다. 즉 이 작품은 실제 사용하기 위해 만든게 아니라 의례를 위한 예기(禮器)였던 것이다.

이런 국보급 작품들을 전시할 때는 한창 전시 준비중이어서 아주 어수선한 전시실에서 불의의 사고를 막기 위해 주변을 모두 치우곤 한다. 그리고 조심스레 작품을 유물 상자에서 꺼내어 미리 계산된 동선대로 움직이며 진열대에 올려놓고 나면 나도 모르게 멈춰있던 숨이 터지듯 입 밖으로 배어나온다.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절대 일어나지 않았음직한 일일수록 괜히 더 생각해서 머리 속으로 시뮬레이션해보는 이상한 청개구리같은 생각. 나는 이 작품이 그랬다. 괜히 머리 속에서는 이 작품을 만지다가 나도 모르게 손잡이를 뚝 부러뜨려버리는 아찔한 상상이 들 때가 많았다.

근데 더 긴장하게 되는 것은 이 작품은 손잡이로 드는 순간 부러져버리는게 99.9%의 확률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단부가 무겁다는 사실이었다. 굽 아래에 손을 받춰도 위에 마땅히 잡을 곳이 없다는 점도 난감했다.

그래서 나는 종종 국보, 보물을 전시할 때가 오면 바쁜 전시실 한쪽을 바라보며 으레 이렇게 외치곤 했다.

"실장님!!!!!!!!!! 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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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뜨 큐레이터의 단상/미술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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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입니다

  2. 안녕하세요. 저도 그 때가 고민이 가장 많을 때였던거 같아요. 물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요.

    저는 고고미술사학과를 나와서 두 영역 모두 맛을 보거나 가까이 지켜볼 수 있어 비교가 가능한데요. 보통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같은 인문학이지만 취업만 놓고 봤을 때는 고고학이 미술사보다는 기회가 더 많다고 말이죠.

    대표적인 이유로는 고고학은 우선 수많은 발굴기관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술사 전공자는 갈 수 없는 곳이죠. 그나마 도자사 전공자는 가능하지만요.

    그래서 단순 비교하자면 고고학이 미술사보다 취업이 더 어렵다고 할 수는 없겠네요.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고민일수록 원론적으로 접근해야 나중에 후회가 덜 하고,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취업, 물론 중요하지만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공부가 무엇인지를 먼저 정하는게 순서에 맞을거에요. 그 다음에 그렇다면 이 공부를 해서 어떤 진로를 갈 것인지 계획을 세워야겠죠.

    대학원 진학을 앞둔 학부생이니 일단은 전공 공부를 넘어 보다 넓은 영역의 인문학 책(전공서, 논문)을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대학원에 들어가면 전공 공부하느라 스펙트럼을 넓힐 여력이 없거든요. 지금 다양한 지식을 흡수해둬야 두고두고 쓸 수 있을겁니다. 저도 이 점이 지금도 아쉽네요. 철학사, 문학사, 신화, 역사 등등 다양하게 읽어두세요. 영어도 원서를 많이 읽으니 독해 위주로 공부해두시구요.

    화이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