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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션 대표의 위엄

2020. 9. 17.

 

당연한 말이지만 내 주변에는 연구자들이 많다. 같은 전공인 미술사 전공자들과 가장 친하게 지내고 있다. 직업군으로 분류하자면 당연히 각 박물관, 미술관의 학예사들이 많고, 이외에도 문화재청 선생님들, 젊은 교수님들과 같이 스터디를 하고 술자리를 종종 가지며 친하게 지내고 있다.

이렇게 연구자들 외에 교분을 나누는 사람들 중에는 대학원, 박물관 업무 등을 통해 알게 된 미술품 매매업 대표(대개 고미술상이라고 부른다. 부르기 쉬운 공식 명칭이 생겼으면 좋겠다), 경매회사 대표도 있다. 이들 중 한 분은 내 고등학교, 대학원 선배(대학원에 입학해서 처음 뵈었는데 알고 보니 고등학교도 선후배 관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인데 내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언제나 나를 응원해주신다. 나로서는 매번 감사한 마음과 함께 정작 나는 해드리는게 없어 죄송하기만 한 그런 선배이다.

몇 년 전 내가 근대회화 전시를 개최했을 때였다. 토요일로 기억하는데 박물관에 출근해서 전시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 중 한 전시실은 박물관 내부가 아닌, 옆에 붙어 있는 아트센터 건물 지하에 있어서 바깥을 통해 관람을 해야했다. 이 전시실로 걸어가는데 우연히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나오는 선배와 마주치게 되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눴는데 이때 내가 건넨 인사가 선배에게는 재밌으셨는지 아직도 술자리에서 이를 회상하며 안주삼아 얘기를 꺼내곤 하신다.

"오~ 형은 역시 머리를 청담까지 와서 하시는구만요. ㅋㅋ"

잠깐 짬이 난다는 선배를 강제로 끌고 오다시피해서 전시실로 안내했다. 이때 전시를 보는 선배의 뒷모습을 보며 꽤 큰 충격을 받았다. 선배는 시간이 없어 찬찬히 감상하지 못했는데 전시실을 휙휙 다니면서 작품에 써있는 제발 서체와 낙관만 보고 누구 작품인지 대번에 알아보셨기 때문이다.

당시 그 전시는 대부분이 처음 공개되는, 혹은 작품이 거의 전해지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들로 이루어졌었다. 그리고 선배는 회화사가 아니라 도자사 전공자였는데 아무래도 대학원에서 만난 사이였다보니 옥션 대표의 정체성 보다는 나와 다른 전공의 대학원 선배라는 인식이 강해서 꽤 놀랐던 기억이 난다.

새삼 '아 형은 옥션 대표지. 참..'했던 기억이 난다. 더구나 전시를 준비하면서 이 작품이 누구의, 어느 시기 작품인지 알아내기 위해 몇 개월 동안 고생했던 기억과 함께 나는 아직 한참 멀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학업과 일의 상관관계에 대해 정답은 없다라고 하지만(쉽게 예를 들어 내 전공과 일이 일치하는게 좋은지, 일치하지 않는게 좋은지에 대한 고민이다), 어차피 공부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학업과 일이 일치되는 직장을 가지는게 낫다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때 선배의 모습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일하면서 습득한 지식의 생명력이 순수 탐구의욕에 의해 섭취된 것보다 강할 때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 1
  • 김용수 2020.09.29 12: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왕이면 일과 전공(흥미)이 일치하는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아무리 잘(좋아)하는 것이라도 생계수단이 되면 힘들긴 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