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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소장품 / 서울시립미술관

2020. 5. 30.

 

며칠 전 서울시립미술관 도서관에 자료찾을 일이 있어 출장을 다녀왔다.

가까운 곳에 미술관, 박물관들이 모여있으니 새삼 편하고 좋다.

평일 오전이어서 관람객은 거의 없었고,

온 김에 전시부터 보자는 생각으로 전시실로 들어갔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한

<모두의 소장품> 전시를 하고 있었다.

1층은 미디어 아트 작품들이 많았는데

차분히 볼 시간은 없어 훓어보고 나왔다.

 

2층 전시에서는 전통 회화, 도자를 현재의 시점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이 많았다.

동아시아 미술사를 전공한 나의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나중에 전시할 때 참고할 생각으로

금세 보고 나오리라는 생각은 금세 잊은채

작품들과 작가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나왔다.

 

 

2층 전시실 입구에 있는 전시 설명.

획이 끊긴 듯이 보이는 컷팅 글자들이 가독성은 낮지만

디자인적으로 괜찮아 보인다.

서울시립미술관은 홈페이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듯이

선의 끊김을 MI(Museum Identity)로 삼고 있는 듯하다.

 

암튼 전시 내용은 이러하다.

 

이수경, <이동식 사원 2008>, 2008

 

예전에 근대회화 전시를 할 때 깨달은 것인데,

유독 그 시기에 산 길을 걷는 나그네 등 인물의 뒷모습을 자주 그렸다.

스산함, 향토적인 풍경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그린게 아닐까?

그만큼 사람의 뒷모습만큼 쓸쓸함을 상징하는 것은 없을테니.

 

고려불화의 부처, 보살들의 뒷모습을 그린 작품

막연한 상상으로 그린게 아니라 실제 전해지는 고려불화들을 기반으로 그린 것이다.

기법도 석채 등 최대한 고려불화 원작 기법에 맞게 그렸다고 한다.

뒷모습의 종교화라니.

불교 신자가 아님에도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켜주었다.

 

신미경, <트랜스레이션 : 청화백자 시리즈>, 2009-2013

 

처음에는 흔한 도자기를 복원하듯 만들어

고급스러운 좌대가 아닌 유물 박스 위에 놓음으로써

문화재란 무엇인가, 명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흔한 작품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나 싶어 작품 캡션을 보니

세상에..

이게 도자기가 아니라 비누로 만든 것이란다.

설명문에는 이렇게 써있다.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서 만들어진 문화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해석될 때, 아무리 정확하게 번역한다 해도 분명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의미의 변화나 이해의 차이를 드러낸다."

 

가까이 가서 마스크를 벗었다.

비누향이 감돌았다.

 

마스크 얘기가 나와서 생각난 건데,

SNS에서 떠도는 말 중에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다니던 날들이 전생같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세상을 파악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감각 중 2개를 차단한채

살아가는 요즘을 생각하면 기묘하고, 서글픈 느낌이 든다....

는 무슨.

 

필요한 때니까 쓰는거고, 필요없게 되면 안쓰면 되는거지 뭐. ㅎㅎ

이럴 때일수록 사소한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무던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버틸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어제부터 코로나19 때문에 다시 휴관에 들어갔는데,

다시 오픈하면 꼭 가까이 가서 마스크를 벗어보시길.

 

최해리, <무중력설죽하매한란사방위>, 2016

 

중국 원대 조맹견, 왕면 등 미술사에서 기라성 같은 화가들의 작품을 모티프로 삼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위치를 자유분방하게 배치한 작품이다.

원본과 복제라는 구분, 상위와 하위라는 위계가 사라진 지금의 문화를 보여준다.

 

나는 미술 작품의 위계만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사라져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강의할 때 늘 예시로 드는 이야기가 있다.

 

만약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이름 모를 아프리카 원주민의 토속 마스크를 놓고 본다면

어느게 더 중요하다는 느낌이 드는가?

 

살아오면서 받은 교육의 효과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다빈치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이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문화는 수평과 수직의 측면에서 고루 구분하여 봐야되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토속 마스크는 아프리카의 역사 · 민속사 측면에서 중요하다.

<최후의 만찬>은 이탈리아 역사 · 미술사 측면에서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

수평 즉, 다양성의 가치에서만 보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다 좋은 것이 된다.

이러면 미술 작품의 특징이 모호하게 된다.

 

반대로

수직의 측면, 즉 그 중에서도 조금 더 가치가 있는 것을 본다면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문화사에 기여한 점이 더 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후 500여 년간 서양문화사의 트렌드를 바꿨고,

미술기법의 전형이 되어줬기 때문이다.

 

이렇듯 미술 문화에는 싫어도 어쩔 수 없는 위계가 존재한다.

모든 것이 다 똑같이 가치있다는 생각은

문화의 퇴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쉽게 말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처럼 생명력이 긴 음악이

분명 존재하는 반면,

언제 나왔는지도 모를 사라진 음악도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우리는 현재 평등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성별, 나이, 경제력 등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사람은 가치있는 존재라고 여기는,

혹은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여기까지는 옳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을 문화에도 강제 적용하는 것은 반대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문화의 위계를 억지로 없애려는 시도는

결국 문화의 무미, 무취, 그리고 무의미를 가져올 것이다.

 

최해리, <자서전>, 2016
최해리, <실재가 되지 않은 수선화라니>, 2016
최해리, <후사의 징후>, 2016
최해리, <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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