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양품 갱지 노트

종로 영풍문고에 있는 무인양품을 구경하다가

갱지가 주는 복고풍 감성에 끌려

딱히 쓸 일 없어 보이는데도 사온

무인양품의 갱지 노트.

 

갱지 특유의 색감에서 오는 편안함과

2,000원 밖에 하지 않는 저가는

잘 써야한다는 부담감에서 날 해방시켜줄 것만 같았다.

 

어릴 때 내가 살던 집은 막 개발이 되기 시작한

강동구의 어느 아파트 단지였다.

단지 문만 벗어나면 아직 논밭이 있었고,

덕분에 자연 시간 숙제로 개구리알 채집도 할 수 있던 곳이었다.

 

당시 나는 친구들과 씽씽카(요즘 말로 킥보드)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놀곤 했다.

한 쪽 다리로 구르며 타야하는 씽씽카로 너무 과하게 돌아다녀서

결국 다리 근육이 늘어나 수술대에 누울 정도였으니

꽤 과격하게 놀았던 것 같다.

 

번갈아가며 굴렀으면 괜찮았을텐데

바보같이 한 쪽으로만 타다가 생긴 일이었다.

수술대에 누운채로 성장하면서 괜찮아질테니

수술은 안해도 된다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안도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하루는 씽씽카를 타고 놀다가

삐라를 주우러 산에 올라간 적이 있다.

삐라를 모아서 경찰서에 갖다주면

학용품을 준다기에 친구들과

가을날 낙엽 줍듯이 한 웅큼 주워서 파출소에 제출했고

상품으로 공책과 연필을 받아왔다.

 

다음 날 학교에서 그 공책에 첫 필기를 하다가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무슨 공책이 글자를 쓰다가 찢어지고

글자를 틀려서 지우개로 지우다가도 찢어지는 것이었다.

 

열 살도 안된 어린 나이였지만

어떻게 나라에서 주는게 이러냐라며

한심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갱지 자체를 보기 힘든 요즘인데

무인양품에서 오랜만에 갱지 노트를 보니

어린 시절이 두둥실 떠오른다.

 

혹시나 싶어서 샘플에 꽤 ‘과격하게’ 써봤는데

다행히 이건 색만 갱지일 뿐 부드럽게 펜이 미끄러져 나가는

무인양품의 품질 그대로였다.

 

이제 여기다 무엇을 남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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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뜨

현재 박물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시각문화를 향유하는 것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미술사, 전시 등을 쉽게 소개하는 아트앤팁닷컴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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