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필시대>전의 디테일 / 국립현대미술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금요일에 국립현대미술관에 다녀왔다.

시청역의 출근 인파가 갓 사라진 9시 15분쯤 도착했다.

 

나는 출근 시간대를 지난 직후의 시간을 꽤 좋아한다.

번잡함에서 드디어 벗어났다는 회색빛 도시의 안도의 한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이 출근길에 가장 많이 들리는 카페의 직원들이

겨우 여유를 찾고 미소짓는 모습을 보며 나도 덩달아 뿌듯해진다.

 

카페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전시를 본격적으로 보기 전 눈과 뇌를 재부팅했다.

 

그러고 카페를 나와 내겐 이례적으로 전시를 보기도 전부터

좋은 전시라는 확신을 갖게 해준

<절필시대>전을 보러 덕수궁관에 들어갔다.

 

무슨무슨 시대전, 누구누구 거장전, 누구부터 누구까지 등

1차원적인 분류에 의한 전시를 주로 보게 되는

우리나라 전시 풍토에 경종을 울릴 만한 기획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보니 나도 내가 기획한 전시는 전부 ‘거장전’이라고 했다.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전시를 해도 괜찮은건지 불안해하시고,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신

결재 상위권자를 설득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전시 개최를 성공시키는게 더 중요했기에.

 

<절필시대>전은 어떤 연유로 인해 붓을 놓을 수 밖에 없었던

화가들만 따로 모아 이들의 작품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해주는 전시이다.

 

나도 잘 몰랐던 작가들이 있어 많은 공부가 되었다.

일본 교토의 사생화풍을 수용한 작품들도 그렇지만,

요즘 내게 화두로 부상한 1950년대 초기 추상회화를 이끌어간

이규상의 작품 세계도 간단하게나마 조망할 수 있어 좋았다.

 

논문을 쓸 때도 그렇고, 평상시에도

누구의 ‘회화 세계’ 혹은 ‘작품 세계’라는 말을 지양하는 편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 보다는 그냥 꽤 오글거리는 표현이라 싫어한다.

특히 논문 제목에는 적합하지 않은 용어라고 생각하는데

이규상의 섹션은 ‘작품 세계’를 조망하다는 말을 사용해도 괜찮을 정도로

초기 추상회화의 여러 양상을 보여준다.

 

구상적인 화면구성에서 물감으로 질감을 느낄 수 있는 마티에르 기법까지

이규상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요소들을 중심으로 선별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도 그랬지만, 한국 근현대미술 전공자들에게 공부를 시켜주는 전시라 할 만하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꼭 소개하고픈 부분은 전시 디자인에 있다.

이번 전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인 1950년대가 시대적 배경이다.

우리에겐 1950년대만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양철 도시락, 붉은끼가 감도는 목재, 마룻바닥 등.

 

작품은 본래 놓여있었던 장소에서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세련되고 현대적인 공간, 진열대 속에 있는 것도 멋있을 때가 있지만

때로는 작품을 둘러싼 공기를 함께 느끼는 것이 더 좋을 때가 있다.

 

1950년대라는 시대 배경 속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소소한 전시 용품, 전시벽 페인팅을

단순한 화이트큐브형이 아니라 당시 느낌이 나게끔 디자인했다.

 

진열대 속 네임택을 고정한 저 못은 누가 봐도

1950년대스러운 못이다.

다양한 기능을 지닌 요즘 못이 아니라

오로지 바닥이나 벽에 박는 용도만 있는 미끈한 못으로

네임택을 고정한 것을 보며 한참을 감탄했다.

 

그리고 벽 페인팅도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균열을 그려넣었다.

 

이런 시도는 실무자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순간적인 느낌과 인상만으로 뒤집으려 하지 않는 오너의 역할도 꽤 중요하다.

전시 개최 직전에 다 해놓은걸 뒤집는 경우를 하도 많이 봐온터라

더 감탄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밖에는 비가 내리는 금요일 오전 시간에

쾌적한 전시실 속에서 홀로 유유히 왔다갔다하는 시간이 유달리 소중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어진 식사와 커피 한 잔도.

이미지 맵

아르뜨

현재 박물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시각문화를 향유하는 것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미술사, 전시 등을 쉽게 소개하는 아트앤팁닷컴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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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4개 입니다.

      • 설명을 들으니 더 좋은 전시라는 생각이 들어요 ~
        전시의 제목 단어선택이 참, '어쩜 저리 딱 ~맞나' 싶은 그런 느낌입니다.
        집에 붙여둔 리플렛에 못을 따라 해 보고 싶네여.

      • 9월까지 하니까 여유될 때 함 보세요. 제목부터 전시구성까지 샤프한 느낌의 전시입니다. ^^

      •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바쁘더라도 추천해주시는 전시는 전부 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요즘 다른 전시를 못봤는데 보러가야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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