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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강의할까?

2020. 5. 31.

며칠 전 회사 공지게시판에 내부 규정 몇 가지가 개정됐다는 내용이 올라왔다.
지금까지는 외부 강의를 하려면
사전 신고가 원칙이었지만,
이제는 강의하고 10일 이내만 신고하면 된다고 한다.

굉장히 큰 변화다.
사전 신고였을 때는
강의 의뢰를 받아도 언제 된다는 말은 물론,
이걸 허락받을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여서
확답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진정되면
슬슬 해볼까.
하게 되도 기관에서만 가능하겠지만,
강의하던 때가 그리워지던 요즘으로선
감지덕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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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소장품 / 서울시립미술관

2020. 5. 30.

 

며칠 전 서울시립미술관 도서관에 자료찾을 일이 있어 출장을 다녀왔다.

가까운 곳에 미술관, 박물관들이 모여있으니 새삼 편하고 좋다.

평일 오전이어서 관람객은 거의 없었고,

온 김에 전시부터 보자는 생각으로 전시실로 들어갔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한

<모두의 소장품> 전시를 하고 있었다.

1층은 미디어 아트 작품들이 많았는데

차분히 볼 시간은 없어 훓어보고 나왔다.

 

2층 전시에서는 전통 회화, 도자를 현재의 시점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이 많았다.

동아시아 미술사를 전공한 나의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나중에 전시할 때 참고할 생각으로

금세 보고 나오리라는 생각은 금세 잊은채

작품들과 작가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나왔다.

 

 

2층 전시실 입구에 있는 전시 설명.

획이 끊긴 듯이 보이는 컷팅 글자들이 가독성은 낮지만

디자인적으로 괜찮아 보인다.

서울시립미술관은 홈페이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듯이

선의 끊김을 MI(Museum Identity)로 삼고 있는 듯하다.

 

암튼 전시 내용은 이러하다.

 

이수경, <이동식 사원 2008>, 2008

 

예전에 근대회화 전시를 할 때 깨달은 것인데,

유독 그 시기에 산 길을 걷는 나그네 등 인물의 뒷모습을 자주 그렸다.

스산함, 향토적인 풍경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그린게 아닐까?

그만큼 사람의 뒷모습만큼 쓸쓸함을 상징하는 것은 없을테니.

 

고려불화의 부처, 보살들의 뒷모습을 그린 작품

막연한 상상으로 그린게 아니라 실제 전해지는 고려불화들을 기반으로 그린 것이다.

기법도 석채 등 최대한 고려불화 원작 기법에 맞게 그렸다고 한다.

뒷모습의 종교화라니.

불교 신자가 아님에도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켜주었다.

 

신미경, <트랜스레이션 : 청화백자 시리즈>, 2009-2013

 

처음에는 흔한 도자기를 복원하듯 만들어

고급스러운 좌대가 아닌 유물 박스 위에 놓음으로써

문화재란 무엇인가, 명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흔한 작품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나 싶어 작품 캡션을 보니

세상에..

이게 도자기가 아니라 비누로 만든 것이란다.

설명문에는 이렇게 써있다.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서 만들어진 문화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해석될 때, 아무리 정확하게 번역한다 해도 분명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의미의 변화나 이해의 차이를 드러낸다."

 

가까이 가서 마스크를 벗었다.

비누향이 감돌았다.

 

마스크 얘기가 나와서 생각난 건데,

SNS에서 떠도는 말 중에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다니던 날들이 전생같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세상을 파악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감각 중 2개를 차단한채

살아가는 요즘을 생각하면 기묘하고, 서글픈 느낌이 든다....

는 무슨.

 

필요한 때니까 쓰는거고, 필요없게 되면 안쓰면 되는거지 뭐. ㅎㅎ

이럴 때일수록 사소한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무던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버틸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어제부터 코로나19 때문에 다시 휴관에 들어갔는데,

다시 오픈하면 꼭 가까이 가서 마스크를 벗어보시길.

 

최해리, <무중력설죽하매한란사방위>, 2016

 

중국 원대 조맹견, 왕면 등 미술사에서 기라성 같은 화가들의 작품을 모티프로 삼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위치를 자유분방하게 배치한 작품이다.

원본과 복제라는 구분, 상위와 하위라는 위계가 사라진 지금의 문화를 보여준다.

 

나는 미술 작품의 위계만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사라져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강의할 때 늘 예시로 드는 이야기가 있다.

 

만약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이름 모를 아프리카 원주민의 토속 마스크를 놓고 본다면

어느게 더 중요하다는 느낌이 드는가?

 

살아오면서 받은 교육의 효과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다빈치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이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문화는 수평과 수직의 측면에서 고루 구분하여 봐야되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토속 마스크는 아프리카의 역사 · 민속사 측면에서 중요하다.

<최후의 만찬>은 이탈리아 역사 · 미술사 측면에서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

수평 즉, 다양성의 가치에서만 보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다 좋은 것이 된다.

이러면 미술 작품의 특징이 모호하게 된다.

 

반대로

수직의 측면, 즉 그 중에서도 조금 더 가치가 있는 것을 본다면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문화사에 기여한 점이 더 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후 500여 년간 서양문화사의 트렌드를 바꿨고,

미술기법의 전형이 되어줬기 때문이다.

 

이렇듯 미술 문화에는 싫어도 어쩔 수 없는 위계가 존재한다.

모든 것이 다 똑같이 가치있다는 생각은

문화의 퇴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쉽게 말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처럼 생명력이 긴 음악이

분명 존재하는 반면,

언제 나왔는지도 모를 사라진 음악도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우리는 현재 평등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성별, 나이, 경제력 등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사람은 가치있는 존재라고 여기는,

혹은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여기까지는 옳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을 문화에도 강제 적용하는 것은 반대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문화의 위계를 억지로 없애려는 시도는

결국 문화의 무미, 무취, 그리고 무의미를 가져올 것이다.

 

최해리, <자서전>, 2016
최해리, <실재가 되지 않은 수선화라니>, 2016
최해리, <후사의 징후>, 2016
최해리, <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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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앤팁 큐레이팅(2020. 05. 17)

2020. 5. 17.

이응노, <생맥(生脈)>, 1950, 이응노미술관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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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1년 넘게 같이 공부해서 그런가 생각나더라고요. 더구나 열심히 하시고 결과도 얻으셔서리 ㅎㅎ 저는 강의도 못하다보니 일상이 지루했는데 전시가 코 앞이라 슬슬 바뻐지고 있어요. 미술 소셜 모임 저도 하고 싶은데 아직은 생각만 하고 있네요. ㅋ 강의 형식말고도 재밌을거 같은데 말이죠. 스승의 날이 민망스럽지만 겸사해서 안부 전해주고 감사합니다. 건강히 잘 지내시고 다음에 뵐께요. ^^

미술관에 書 : 한국 근현대 서예전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020. 5. 7.

"書者, 散也."

전시를 모두 보고 나오는데 마지막 벽에 써있던 문장입니다. 중국 한나라의 채옹이 쓴 문장으로 직역하자면, "글씨는 흩뜨리는 것이다"는 의미이죠. 흩뜨리는 것의 대상은 마음입니다. 즉 글씨란 솔직한 마음을 풀어야 제대로 된 글씨라는 얘기입니다.

우선 이 전시는 근대의 서예가들의 작품부터 그들을 계승한 현대의 서예까지 전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유럽 · 미국의 추상회화를 그대로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화용필동법(글씨와 그림은 붓 쓰는 방식이 같다), 서화동원(글씨와 그림의 근원은 같다)의 전통 위에 받아들여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이응노 등의 문자추상, 서체추상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미술사적 의미가 깊은 작품들이 주를 이루지만, 서예의 필선을 재기발랄하게 펼쳐낸 작품들도 많아 '선의 향연' 속에서 안복(眼福)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안복(眼福)' 이런 말, 오글거려서 회피하는 편인데 어제 본 이 전시는 이 단어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더군요. ㅎㅎ

서체를 기반으로 한 디자인 섹션까지 총 4개의 전시섹션을 모두 보고 나오는 데 마지막 벽에 써있는 채옹의 "書者, 散也."를 의역한 "서는 내면의 정감을 토로하는 예술이다"는 문장을 보고 전시의 마침표를 잘 찍었다는 감탄을 하게 되었죠. 많은 작품들을 보고 나오던터라 자칫 머릿속이 와글와글해질 수 있던 차였는데 이 전시의 핵심 메시지를 다시 보여주며 서예가 지닌 미적 가치의 근본을 다시 상기시켜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전시를 기획한 학예사에게 마지막 이 문장 누구 아이디어냐, 참 센스있고 전시 감상의 마무리를 잘 매조지을 수 있게 해주더라며 물으니 쑥스러워 하더군요. ㅎㅎ

코로나19로 전시 준비를 다 마쳐놓고도 휴관 상태에 있다가 어제 개막을 했습니다. 아직은 위험하기에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한 사람들만 관람할 수 있는데 예약이 어려운건 아닌 듯합니다. 신분증과 마스크는 필수이고요.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전시 디자인도 기존의 단조로운 화이트큐브형에서 벗어나 입체감있는 공간으로 꾸몄기에 전시실 다니는 맛도 좋습니다. 이 전시를 통해 동아시아 서화 전통의 본령이 무엇인지 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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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듯 먼 봄날의 숲 by 김민주

2020. 5. 5.

한 달 넘게 재택 근무를 했다. 2월 말부터 지난 주까지 봄이 오는 것을 느낄 새도 없었다. 아마 모든 이들이 그랬을 것이다. 재택 근무를 한다고는 하지만 사무실에 나올 때도 꽤 많았다. 이 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결재 서류 챙기러 오전 시간 느지막히 사무실에 나왔는데 마침 친한 직원도 나와 있었다. 그동안 항상 엇갈려서 못본지 꽤 된 듯했다.

 

반가운 마음에 오늘은 조금 걷더라도 맛있는 것을 먹으러가자며 길을 나섰다. 나는 식욕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지 않는 편인데 그런 내가 이런 제의를 했던 것을 보면 오랜만에 꽤 반갑긴 했던 모양이다.

 

서울역 광장을 지나 염천교로 슬슬 걸어갔다. 여전히 쌀쌀했지만 그 차가운 공기 가운데 포근한 냄새가 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코로나19로 많은 것이 얼어붙고, 많은 것이 멈춰도 어김없이 봄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염천교 수제화 거리로 들어서자 어릴 적 아버지 손을 잡고 종로를 걸으며 봤던 거리에 대한 기억이 겹쳐졌다.

 

재택 근무가 여러모로 좋았지만, 팀 사정상 정신없는 나날이기도 했다. 집에서 기획서 쓰고, 결재 서류 만들고 하다보면 어느새 6시를 넘긴 때가 많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점심 식사를 하러 가는 순간의 풍경조차 반가웠다.

 

횡단보도에서 초록색 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저 멀리 벚꽃 사이로 중림동 약현성당의 첨탑이 보였다. 가을 낙엽으로 유명한 곳인데 봄 풍경도 근사했다. 화사한 분홍색의 벚꽃 나무들로 둘러싸인 성당의 모습이 평화로워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풍경이라 생각할 정도로 평범하지만, 이 평범함이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긴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말이 욕심많구나로 해석되기도 하는 세상이니 오죽할까.

 

이 날 본 풍경과 오랜만에 느낀 봄기운은 김민주의 <사유의 숲>을 떠올리게 했다. 저런 숲과 정자가 있다면 배를 타는 수고로움을 무릅쓰고라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잠기게 해준 작품이다.

 

김민주, <사유의 숲>, 2017, 장지에 먹과 색, 66.0×96.0

via 김민주 작가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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