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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직업적 정체성

책장을 정리하다가 10여 년 전 석사논문을 쓸 때 공부했던 제본과 A4용지 뭉치가 나왔다. 또 고질병이 도졌다. '이걸 버려야하나. 아니야 분명 나중에 필요할 때가 있을거야. 아닌가.' 사람을 한 단어로 규정한다는게 참 어리석은 일이지만, 최소한 직업적 정체성에는 깔때기를 들이대도 괜찮지 않을까. 그 깔때기에는 어릴 때의 꿈,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경제력 등이 혼재되어 있지만 결국 그 아래로 흘러나오는 것은 이중 하나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꿈은 역사학자이다. 그리고 역사라는 학문에 여러 갈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이왕이면 아름다운 것을 다루는 미술사학자가 되고 싶었다. 이 꿈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문헌을 찾아 해석하고, 작품을 분석하여 여러 층위로 구분하고 나의 생각을 최대한..

콘텐츠와 미술기법의 완성도

18세기에 활동한 도화서 화원인 변상벽(1730-?)은 영조의 어진을 그릴 정도로 초상화로 실력을 인정받은 화가이다. 도화서 화원이라고 하면 일단은 그 실력이 보장되는 화가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최고여야만 맡을 수 있는 왕의 초상을 그렸다고 하니 프로 중에 프로인 것이다. 변상벽은 이같은 공식 업무 외에 '변 고양이'라는 별명까지 가질 정도로 일생에 걸쳐 고양이 그림을 많이 그린 화가이기도 하다. 왕의 초상과 고양이 그림이라는 화제에서 받는 느낌의 무게감은 서로 너무 다르다. 같은 화가인가 싶을 정도로 하나는 너무 진중한 주제이고, 하나는 일상의 유희에 가깝다. 특히 인스타그램, 유튜브를 통해 소위 '남의 집 고양이'를 보는 즐거움이 가득한 요즘의 눈으로 보니 그 유희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참..

때로는 작품을 직접 만져봐야 알 때도 있다.

전시를 위해 작품을 만지다보면 새로운 힌트를 얻을 때가 종종 있다. 이 작품은 라는 이름의 국보 281호이다. 워낙 완성도도 뛰어나지만 조선 전기에 제작된 수 많은 주자(주전자) 중에서 유일하게 몸체가 병의 형태로 되어 있는 희소성 덕분에 국보로 지정된 작품이다. 전시를 할 때 가장 긴장되고 어지간해서는 만지기 싫은 작품들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였다. 보기에도 갸냘픈 주구(注口)와 손잡이 때문에 포장하는 것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고, 포장을 푸는 것도 가장 천천히 도 닦는 심정으로 해야했기 때문이다. 국보라는 상징성도 긴장에 무게를 더해주었다. 무엇보다 눈으로 볼 때는 잘 모르지만 직접 만져보면 병 하단이 엄청난 두께감과 함께 무거웠다. 즉 이 작품은 실제 사용하기 위해 만든게 아니라 의례를 위한 ..

공예와 미술의 관계

한창 개관 준비로 바쁜 서울공예박물관에 다녀왔다. 요즘 협업을 위해 여러 기관, 기업들을 만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술에서 공예만 떼어다가 이렇게 해도 괜찮은걸까?" 공예의 특장을 살리고 공예문화가 발전하기 위한 노력은 좋으나, 이런 노력들이 오히려 미술로부터 유리되어 가는 미래를 맞이하게 되는건 아닐까라는 우려가 들었다. 미술과 공예의 관계에 대해서 아직 명확하게 개념 정리가 되어 있지는 않다. 앞으로 해결해야될 문제다. 흔히 회화와 조각은 순수미술, 공예와 건축은 응용미술로 보고는 있는데 이 역시 동양화와 서양화의 관계처럼 불분명한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미팅을 마치고 나오며 직장에서의 일을 떠나 공예비평, 논문 등 할게 많다는 생각을 하다가 예전에 우리 교수님이 ..

미술품 물납제에 대하여

"삼성이 상속세를 내야하는 마감일이 다가오자 언론들 총출동" 등의 이야기를 굳이 여기서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사람들이 한 가지 알아줬으면 하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미술품 물납제'의 취지는 불의의 일격으로 세금 폭탄을 맞아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에 있다. 쉽게 예를 들자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남남으로 살아왔는데 알고보니 부모 중의 한 명이 유명한 미술가였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막대한 상속세를 내야하는 상황에 처한 유가족을 배려하고, 동시에 문화유산도 지킬 수 있다는 명분으로 생긴 제도이다. 국가가 예술을 관리하는 프랑스가 대표적인 물납제 적극 시행 국가이다. 법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최소한의 안전 장치로 기능해야 하는데 ..

기계식 키보드와 키보드 손목받침대를 사다.

"훌륭한 목수는 연장탓을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요. 저는 연장탓을 합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목수가 아니기 때문이죠. ㅎㅎ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웹소설 작가들의 브이로그를 보게 되었는데 작가들 대부분이 기계식 키보드를 사용하더군요. 단순히 게임할 때 사용하는 키보드로만 알고 있었는데 유튜브로 보니 이 기계식 키보드가 글을 쓸 때도 참 쓰는 맛이 좋아보였습니다. 소리도 경쾌해서 타자를 칠 때마다 손의 리듬도 살아나고, 마치 ASMR처럼 중독되는 것 같더라고요. 흔히들 손맛이라고 표현하던데 막상 저도 사서 써보니 글을 잘 쓰기 위한 스트레스를 소리가 숨겨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산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직까지는 뭐 더 글을 쓸게 없나 하고 고민하고, 괜히 메모장을 켜서 책에 있는 문장을 ..

일상 2021.02.23 (2)

큐레이터? 프로젝트 매니저?

올 초에 팀을 옮기고 벌써 2개월이 되어간다. 급작스러운 인사발령이었지만, 공예 관련 부서로 옮긴 지금 꽤 만족스럽게 일을 하고 있다. 지난 1월에 이 팀으로 온 뒤로 업무 파악을 위해 지난 결재 문서를 보며 공부하고 업무에 투입되느라 정신없이 연초를 보낸 것 같다. 미술사 중에서 회화사를 전공했고 앞으로도 그럴테지만 호림박물관에서 학예사로 있으며 했던 수많은 도자, 공예 전시를 했기 때문일까. 공예에 대한 매력을 갖고 있던 차였다. 큐레이터도 넓게 봤을 때 프로젝트 매니저 중에 하나이다. 다만 큐레이터에게 프로젝트는 평상시에 하는 유물 관련 일을 제외하고 전시기획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권한과 책임이 좁다는 느낌을 박물관에 있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조금 더 넓고 큰 프로젝트를 맡으려면 큐레..

박물관및미술관진흥법 일부 개정 법률안에 대하여

오늘 황당한 소식을 접했다. 배현진 의원이 '박물관자료'의 대출이나 열람서비스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 대출 및 열람 서비스 제공을 막고 있기에 국민들이 이를 누릴 수 있도록 일부 개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아. 박물관의 도서관에 있는 도록, 해외논문집을 의미하나보다'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박물관의 도서관에서는 열람은 가능해도 대출은 할 수 없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불편할 때가 있어 가능하게 되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개정안을 읽어보니 배현진 의원실 측에서 '박물관자료 = 유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박물관및미술관진흥법」 제2조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3. “박물관자료”란 박물관이 수집ㆍ관리ㆍ보존ㆍ조사ㆍ연구ㆍ전시하는 역사ㆍ고고ㆍ인..

광희 마스크 -> 청각장애소통용 립뷰 마스크

코로나19로 점철된 2020년에 어느 순간부터 방송에서는 특이한 마스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마스크를 황광희씨가 쓴 모습으로 처음 봤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특이한 마스크네'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후 한 두명씩 이 마스크를 쓴 연예인들이 늘어나면서 아.. 방송 화면에서 누가 말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줘야하는 시각 미디어 특성 때문에 그런거구나라고 생각했다. 시중에서는 라고 불리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나의 장애인에 대한 무지함과 배려심 부족한 잘못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마스크는 단순히 방송용, 혹은 패션용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술 모양을 봐야하는 청각장애인과 소통하기 위한 배려의 마스크였다. 공식 명칭도 광희 마스크가 아니라 '청각장애소통용 립뷰 마스크'다. 이 사실을 알게..

일상 2021.02.14

이번 겨울

지난 연말 온라인으로만 개최한 전시를 오픈했다.나는 다른 일을 맡아서 전시팀의 다른 동료들이 준비한 전시인데하루는 전시실에 갔다가 한참을 서서 추억에 잠기게 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앨범인토이의 앨범 자켓을 시작으로이승환, 신해철, 015B, 자우림, 윤종신, 김성재까지단어 그대로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몸 깊은 곳에서 가슴까지쌔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오프라인으로 오픈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어느 늦가을 날 교보문고 뒷편에서. 전시 준비가 한창인 옛 서울역. 전시 오픈 전 날, 어김없이 야근의 시간이 돌아왔다.광장에서 작업하는 일을 도와주러 나왔다가한 켠에 고인 물 웅덩이를 보고쭈그려앉아 사진을 찍었다. 한 밤중의 서울역 내부. 전시 개막식 겸 기자간담회.박물관에 있을 때부터 뵈어온 반가운..

일상 2021.02.1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