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앤북, 자주 가고 싶어지는 서점이 명동에 생겼다.


1. 명동의 추억


지난 연말에 새로운 서점이 오픈했다. 서점 오픈하는 것이야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아마 자신이 자주 가는 동네에 생긴다면 느낌이 다를 것이다. 내게 아크앤북은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명동은 광화문과 함께 추억이 참 많은 곳이다. 일본에 어학연수를 다녀오자마자 명동 스타벅스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과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당시는 겨울연가, 보아 등을 중심으로 첫 한류 열풍이 일었던 때라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여행을 본격적으로 오던 때였다. 그 친구도 한류 붐을 타고 우리나라에 처음 놀러 온 터였다.


명동은 당시 그들에게 필수 코스였다. 명동의 화장품 매장들은 처음으로 일본어가 유창한 아르바이트생들을 고용했고, 좌판대에선 한류 스타들의 브로마이드와 같은 각종 상품을 팔기 시작했다. 모든 식당마다 일본어 메뉴판을 함께 마련해두기도 했다. 역사 속에서나 배우던 한일 문화교류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던 좋은 추억의 시기였다. 2005년에 일본 우익들의 본격적인 망언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한일관계가 참 평화롭게만 느껴졌던 마지막 시절이었다.


이런 추억이 있어서인지 명동은 언제나 여행을 온 듯한 느낌을 준다. 명동 거리를 가득 메운 외국인들 틈에서 나도 관광객이 되는 상상을 하게 한다. 그래서 가끔 여행이 가고 싶으나 여의치 못할 때는 명동엘 간다. 작년에 전시 자문으로 일본에서 교수님을 모신 적이 있다. 김포공항에서 교수님을 처음 뵌 것을 시작으로 3박 4일동안 명동에 있는 호텔과 박물관 오가는 길을 편하게 해드리고자 차로 모셔다 드렸다. 그리고 아침에 늦지 않겠다는 것을 핑계 삼아 나 역시 명동 호텔에 머무르며 진짜 관광객이 되어 보기도 했다. 항상 복잡하기만 한 명동 롯데백화점 앞 길을 모든 것이 잠이 든 새벽에 호텔 창가에 서서 감상하는 행운도 맞이할 수 있었다.


새벽 1시의 명동 앞 거리


아침 7시의 명동 앞 거리


2. 아크앤북 첫 방문


이런 추억을 간직한 명동에 서점이 생긴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자주 가게 될 것이란 느낌이 불현듯 들었다. 아크앤북이라는 서점으로 을지로입구역에서 1-1번 출구로 연결돼있어서 접근성도 아주 좋았다. 처음 방문을 한 날, 우선 서점 전체를 찬찬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우선 넓은 공간을 유기적으로 돌아다닐 수 있게끔 공간 배치를 잘 해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책 분류대로만 섹션을 구분한 것이 아니라 책구경을 하면서 '저기엔 뭐가 있을까?'라는 호기심이 들게끔 했다. 가운데에는 책 터널을 만들어 놓아 안쪽에는 카페와 쉴 곳을 마련해놔서 잠시 쉬었다 가기에 적당했다.



이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책과 문구류를 함께 배치해놓은 매대가 곳곳에 있었다. 항간에는 책이 중심이 아니라 다른 상품을 팔기 위해 책이 존재한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지만 내가 문구류 자체를 워낙 좋아해서인지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일단 나는 책을 사고 싶은 사람은 어찌 해놔도 책을 살테니 큰 문제 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빨간 전화부스처럼 전체적인 인테리어는 유럽 서점의 느낌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아크앤북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떠오른 것은 런던에 있는 <Daunt Books>였다. 짙은 고동색의 서가, 매대, 책 배치 방식 등이 유사해서 몇 년 전 런던에 갔을 때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래 사진 3장은 햇빛 쨍쨍한 어느 날, 갑자기 내리는 비를 맞으며 <Daunt Books>에 갔을 때 촬영한 것이다.


<Daunt Books>


<Daunt Books>. 저기 걸려있는 지도들 중에서 파리와 런던 지도를 사와서 한동안 방에 걸어두며 바라보곤 했다.


<Daunt Books>


다시 아크앤북으로 돌아와서.


미술 코너엔 어떤 책들이 있는지 가봤다. 책 분류도 기준있게 해놓았고, 종류도 다양해서 마음에 들었다. 신간과 두고두고 읽어 봐야 할 옛 책들이 조화를 이루며 배치되어 있었다.




전집류도 이렇게 해놓으니 순간 충동 구매가 일 정도였다. 당분간 책 구매를 자제하기로 한 터라 전공 서적이 아니면 참기로 했다. 10여 년 동안 한 달에 10~20만원씩은 꼬박 책값으로 써왔는데 당분간은 학교 도서관을 적극 이용할 것이다. 등록금 본전치기랄까. ㅎㅎ



오광수 선생님의 『한국현대미술사』와 같은 오래된 필독서와 최근에 간행된 윤난지 선생님의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가 함께 있고, 양정무 선생님의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시리즈도 전권 다 있었다(최근엔 5권 르네상스편도 나왔다). 무엇보다 미술사를 좋아하는 한국인이라면 꼭 봐야할 최순우 선생님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도 있는 것을 보며 미술, 디자인 분야에 특히 신경을 썼다는 인상을 받았다.



중국미술사의 개론서도 모두 있고, 불교미술사 필독서도 고루 잘 갖춰놨다. 이런 모습을 보며 나도 미술사 책 새로 나온거 없는지 확인할 겸 이곳에 종종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정도로 신뢰감이 드는 곳이었다.



한쪽 구석엔 디자인 상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봄이 되면 에코백을 다시 꺼내 들리라.



이런 모습보면 안사도 되는데 왜 사게 되는걸까. 연필향이 너무 좋다. 연필향 나는 향수 있으면 하나 사서 매일 방에 뿌리고 싶다.



순간의 스킬을 다룬 책보다 기본을 다룬 책은 사도 결코 후회하지 않게 된다. 간헐적이나마 두고두고 볼 수 있는 생명력이 길기 때문이다. 이 책이 그런지는 안읽어봐서 모르겠지만.



나에게 책과 함께 가장 피하기 어려운 유혹 중 하나는 바로 노트다. 굳이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서점에 가서 문구 코너를 한창 서성이다 오는게 낙이다. 가끔 광화문 교보문고의 핫트랙스 직원들이 '쟤 또 왔어' 이럴까봐 괜히 의식할 정도다. 이는 전적으로 3살부터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날마다 광화문 교보문고를 데려간 부모님 때문이다. 교보문고에서 책을 사고 나와 양손에 부모님 손을 잡고 종로 거리를 걸으며 보던 보도블럭 문양까지 아직 생생하다.



마지막으로 축구 관련 책들도 봤다. 축구는 내 인생의 전부다. 94년 미국 월드컵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유럽 축구는 언제나 내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한때 피파 에이전트가 되는 것도 장래 희망 중 하나였다. 광고대행사에서 3년 정도 일하고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피파 에이전트사 마케팅팀에서 근무를 함으로써 모든 소원까지 다 풀고 공부하러 왔다. 그렇게 해서인지 공부를 하면서도 힘든 학문의 길로 들어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어릴 때 가졌던 모든 꿈을 한 번씩 맛보고 와서인지 '내가 대학원에 안들어오고 취직했더라면 어땠을텐데.'라는 식의 후회가 전혀 안들었다. 중도 포기자가 꽤 많은 이 학문의 길에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만약 우리나라 축구 산업의 파이가 유럽이나 미국처럼, 아니 하다못해 일본만큼이라도 컸더라면 계속 해볼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가끔 한다. 시장 자체가 너무 작다보니 마케팅 전략도 뻔하고, 수준은 낮을 수 밖에 없어 전혀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 덕분에 마찬가지로 파이가 작은 우리나라 미술시장에서의 예술경영, 박물관학에 대한 기대 역시 상당히 낮은 편이다.


3. 아크앤북을 나서며


지금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쓴 것 같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는 모두 아크앤북을 돌아다니면서 했던 생각들이다. 서점이 추구해야 할 길은 이 점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방문하는 모든 이들이 조용히 책을 구경하고, 무엇을 살지 고민하며 각자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들게끔 해주는 역할. 이러한 역할에 서점의 본질이 담겨 있을 것이다. 자주 들릴 것 같은 서점 하나가 또 생겨서 좋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명동에 생겨서.



p.s.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서점 속에 있는 식당에 구매하지 않은 책도 갖고 들어갈 수 있게 한다는 것에 있다. 그건 막아야하지 않을까. 대형 서점들이 그렇게 운영함으로써 생기는 책의 파손을 모두 출판사에 떠넘긴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북카페식 운영이 요즘 트렌드라지만 이건 북카페식 운영이 아니라 비상식적인 운영에 가깝다. 서점이 스스로 책을 함부로 다루는 것이다. 트렌드도 좋지만 적당히 하시길.


이미지 맵

아르뜨

현재 박물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시각문화를 향유하는 것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미술사, 전시 등을 쉽게 소개하는 아트앤팁닷컴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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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4개 입니다.

      •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옛 사진을 계속 간직하고 계셨네요. 나란히 있으니 그렇구나하고 더 이해가 되어져요. 책에서 나는 종이향과 파란 연필향이 전해집니다.
        그러고보니,, 중국과의 축구가 한창입니다ㅎ

      • 글에서 종이향, 연필향을 느끼셨다니 괜히 뿌듯해지네요. 방금 축구 보면서 한 잔 했는데 이겨서 더 뿌듯합니다. ㅎㅎ

      • 비밀댓글입니다

      • 이니스프리에 카페도 있나보네요. 몰랐어요. ㅎㅎ 한 때 CGV 라이브러리 유명했는데 아직 못가봤네요. 아직 있으려나? 담에 명동갈 때 가봐야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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