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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시 소개

<유연한 공간>전을 보고 / 세화미술관


저녁노을이 질 때쯤 광화문 사거리 횡단보도에 서서 노을이 지는 쪽을 바라보면 묵묵히 일하고 있는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망치질 하는 사람(Hammering Man)>을 볼 수 있다. 망치질 하고 있는 모습이 역설적으로 너무나 고요해서 마치 종교의식을 치르고 있는 느낌마저 드는 조각상이다. 구스타프 쿠르베가 19세기 파리의 노동자들을 성스럽게 표현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몸짓이랄까.


조각상 옆에는 흥국생명 빌딩이 있는데 이 건물 3층에 세화미술관이 들어서있다. 광화문을 자주 가면서 세화미술관 방문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빠르게 지나가는 길목에 있어서 지나다니며 언제 가봐야겠다고 다짐만 했다가 이번에 처음 다녀왔다.


이번 전시는 꼭 봐야겠다고 생각을 한 이유는 전시 소개글에서 찾을 수 있다.


관람객은 화이트큐브의 경직된 공간 대신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미술관 공간을 체험하게 된다. 직조 등 전통 섬유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에서부터 광섬유를 활용한 오브제, 실을 연결하여 공간 사이에 관계를 형성하는 작품, 패브릭을 활용한 공간 드로잉, 실로 감싼 집 등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섬유의 물성을 활용하여 공간과 적극 소통하며 각각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펼친다.


대개 회사 빌딩에 입주한 미술관들은 전시 공간의 제약을 많이 받는다. 어쩔 수 없는 한계이며 큐레이터들은 전시를 할 때마다 고생하게 되고, 아쉬움이 많다. 세화미술관 역시 흥국생명 빌딩 3층에 있어서 같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 가장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으로 화이트큐브형으로 공간을 꾸미는 것을 들 수 있다. 쉽게 말해 창문을 가린 직육면체 공간에 하얀 페이트칠을 한 벽으로 마감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하면 전시는 단조로워질 수 밖에 없다. 벽에 회화작품을 높이만 통일해서 걸어버리거나, 마치 무심한 손길로 놓은 듯 조각상을 비정형으로 배치하는 것으로 끝내기 때문이다. 나처럼 전시기법 보다는 작품에 더 집중하는 미술사 연구자들은 작품만 보면 되기 때문에 크게 신경쓰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전시 자체는 심심해져 작품이 주는 효과가 반감되는 경우가 많다. 전시 소개글에서 말한대로 이런 한계가 있는 공간을 어떻게 채웠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섬유 재료를 공간 연결에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해서도 보고 싶었다.


<유연한 공간>전은 섬유를 주재료로 사용하는 공예작가 5인(강은혜, 노일훈, 박혜원, 정다운, 차승언)을 선정하여 각 공간을 담당하게 한 전시이다. 작가들은 작품을 세화미술관 속 공간을 적극 활용하여 제작했다. 집 속에서 뻗어나오는 빛을 벽에 비춰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인연에 대해 보여주거나(박혜원), 공간을 마치 고구려 고분벽화인 <수렵도>의 무대처럼 꾸며 새로운 산수, 풍경을 선보였다(노일훈). 서울역사박물관 쪽에서 비춰오는 햇빛으로 패브릭의 화려한 원색을 강조하여 시각적 즐거움을 보여주는 공간(정다운)은 전시실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찾아보게 만들었다.


전체 전시공간 역시 제목(유연한 공간)에 걸맞게 잘 구분했다. 전체 공간은 작지만 많은 것을 보고 온 느낌이 들 정도였다. 조용히 생각에 잠긴채 관람하기 좋은 전시였다. 특히 설치미술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