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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한 권의 책

[월간미술 기고(2018. 10)] 피터 드러커의 붓의 노래(21세기북스, 2011)


월간미술 10월호에 서평을 기고했습니다. 이제 11월호가 나왔으니 전문을 공개해도 괜찮을 듯하여 이곳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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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피터 드러커, 이재규 역, 『붓의 노래』, 파주: 21세기북스, 2011


유럽인들이 좋아하는 일본의 그림은 크게 두 개로 구분된다. 하나는 강렬한 원색과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꽉 찬 구도가 인상적인 우키요에(浮世絵)와 같은 장식 채색화이다. 다른 하나는 서양미술사의 전통에서 전혀 볼 수 없는 것으로서 미술을 심상(心想) 표현의 수단으로 삼은 동아시아의 전통 수묵화이다. 물론 서양미술에도 심상의 표현이 담긴 작품들이 있다. 그러나 서양미술이 인체의 감각기관이 받아들인 것을 그대로 표출하려 했다면, 동아시아 미술은 감각기관과 무관하게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을 그리려했고 이는 자아의 성숙, 정신적 가치의 발현에 무게 중심을 둔다는 점에 큰 차이가 있다. 즉 서양미술이 ‘내가 지금 본 것’을 그린 것이라면, 동아시아의 미술은 ‘내가 점차 보아가는 것’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의 발견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후자에 매료된 이들은 대체로 오랜 세월에 걸쳐 동양미술을 접하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이가 많은 편이다. 그 중에는 미술사학자, 큐레이터와 같은 연구자는 물론이고, 일관되게 작품을 접하고 수집해온 컬렉터도 포함된다.


일본미술은 동아시아 미술의 정신성 표현이라는 여러가지 화법 중에서 가장 시각적으로 강렬한 양식을 바탕으로 전개되어 왔다. 특히 무로마치시대의 수묵화는 한국, 중국의 전통 수묵화보다 간결하고 산뜻한 표현을 선호했으며 윤곽의 마무리가 확실한 편이다. 사실 이러한 차이는 아주 미묘한 것이어서 같은 수묵화 영역 안에서도 구분하기란 무척 어렵다. 연구자들에게도 한국, 중국, 일본 수묵화의 차이에 대해 명쾌하기 설명하기란 아주 어려운 문제이다.


이 어려운 문제를 동아시아 출신도 아니고, 미술사 연구자도 아닌 '경영학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피터 드러커(1909-2005)가 『붓의 노래』(파주: 21세기북스, 2011)를 통해 명쾌하게 설명해주었다. 피터 드러커는 1934년에 런던에서 일본회화를 처음 접한 이후 1979년에 '산소 컬렉션(Sanso Collection)'으로 명명할 정도로 많은 일본회화를 수집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수집해왔으니 반 세기가 넘는 시간동안 살펴보고, 분석하고, 직접 투자하여 수집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일본회화를 단순한 수집에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 일본의 경제, 사회를 들여다보고자 하였다. 피터 드러커는 경영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가깝게는 조직 구성원, 멀게는 인간에 방점을 찍은 바 있다. 요즘 인문학 열기에 이미 수 십년 앞서 경영을 인문학에 연결지어 고찰했던 경영 '구루(Guru)'다운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몇 년전부터 서점에서 미술과 기타 학문을 서로 연결지은 책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인문경영'의 열기 때문인지 경제학적인 시각으로 미술작품을 바라 본 책이 인기가 많은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는 미술사에서 이미 사회경제사적 방법론으로 체화된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는 것에 그쳐 색다른 해석을 찾기란 무척 어렵다. 더불어 미술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가 수반되기 보다는 에피소드 나열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아 신뢰할 만한 미술 입문서를 찾는 이들에게 불편을 끼칠 정도이다.


이 지점에서 『붓의 노래』는 경영이 미술을 만났을 때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표준을 제공하고, 일본의 중, 근세 회화사 개설서로 사용해도 손색없을 정도의 깊이를 제공한다. 이해를 돕기 위한 번역자의 해설도 책의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다만 피터 드러커가 이 책을 처음 쓴 시점은 1979년으로, 당시 일본의 경제가 세계 시장을 주름잡던 시기여서 경제에 관한 내용은 지금의 상황과 맞지 않은 내용도 담겨있다. 그러나 이 책을 하나의 역사서로 받아들인다면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닐 것이다.


전문가라는 칭호는 한 분야의 정통함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세상 전반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선사해야된다. 한 분야의 정통함을 다른 분야에 대한 몰이해의 방패로 삼는 자에게는 과분한 칭호라 생각한다. 피터 드러커는 진정한 전문가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었으며, 요즘들어 더욱 보기 힘들어지는 컬렉터의 전범(典範)이 되어주었다. 재투자의 수단으로, 혹은 본능에 충실한 완물상지(玩物喪志)로서 미술품을 구입'만'하는 이들에게도 꼭 소개해주고 싶은 책이 바로 피터 드러커의 『붓의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