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스타벅스의 머그잔으로 본 18세기 서양미술사 이야기


소녀 감성이 여전히 풍부하신 어머니는 아기자기하고 소소한 물건들을 모으시고, 화초 가꾸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여기신다. 베란다가 무너질까 두려워 화초를 거둬낼 정도로 화분이 많고, 여행지에서 사오신 각종 기념품, 특히 그릇이 많은 편이다. 평생 공부하고 책 읽는 것을 벗삼아 살아오셔서 문구류에 대한 애착도 강하시다. 그래서 우연히 내가 산 몰스킨이나 만년필을 보시면 어머니가 더 반색하시며 시필을 하실 정도이다. 내가 사드린 만년필만 10여 자루는 될 듯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부쩍 해외 여행을 자주 다녀오셨는데 요즘은 현지 스타벅스에서 머그잔 사오는 것을 취미로 삼고 계신다. 모든 나라의 스타벅스 머그잔을 다 모으는게 꿈이라며 소박하기만 한 취미를 굉장히 소중하게 말씀하신다.



오랜만에 긴 연휴를 맞아 집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며 어머니의 기념품 코너를 구경하고 있는데 작년에 사오신 스타벅스 런던의 머그잔에 시선이 머무르게 되었다. 다른 나라들의 평범한 디자인 문양이 들어간 머그잔에 비해 컨셉이 다르다는 것을 금세 느낄 수 있었다. 트렌디한, 어찌 보면 산만해 보일 수도 있는 다른 나라들의 것과 달리 훨씬 더 고풍스러우며 차분함에서 우러나온 세련미가 느껴졌다.


이같은 이질감은 런던 스타벅스의 머그잔이 18세기에 성행한 자국의 도자기를 모티프삼아 만든 데서 기인한 것이다. 대부분의 머그잔이 일러스트레이션에 기반한 문양을 갖고 있다면, 런던 스타벅스의 것은 마치 박물관 뮤지엄샵에서 파는 기념품처럼 고미술을 응용한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럽 도자기의 전개와 당시 유행한 신고전주의를 알아야한다.


유럽 도자기의 발전양상


도자기 문화의 발상지이자 최고 기술을 갖춘 나라는 중국, 한국, 베트남, 일본이다. 특히 청화백자는 중국을 중심으로 조선, 베트남에서 발전했는데 당시 유럽은 백자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깨지기 쉬운 도기 수준에 머물러있을 뿐이었다. 1497년에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해상무역로를 개척한 이후 유럽과 중국간 교역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유럽은 1602년 네덜란드가 동인도회사를 설립함과 동시에 중국의 자기를 대량 수입해가면서 유럽에서 중국 청화백자 열풍이 일어나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회화를 보면 이슬람을 통해 수입한 청화백자가 간헐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본격적인 유행은 17세기 초반부터이다.


1752년 침몰한 네덜란드 겔더말슨(Geldermalsen)호에서 발굴된 중국 청화백자


중국의 청화백자는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프랑스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궁 곳곳을 장식할 정도로 유행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무역을 중심으로 한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부르주아들의 과시욕에 의해 청화백자를 향유했다면, 프랑스는 철저히 왕실 중심의 취향이었다. 이를 두고 중국 취향, 프랑스어로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고 한다. 시누아즈리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글을 쓸 예정이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재위 기간동안 중국의 청화백자를 수입해서 베르사이유궁을 장식했지만 루이 15세가 즉위한 이후에는 직접 자기를 생산하게 되었다. 독일의 마이센에서 자기를 생산한 것에 자극받은 것도 요인 중 하나이다. 프랑스는 루이 15세의 애인이었던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에 힘입어 본인들의 취향에 맞는, 예를 들면 '국왕의 청색(bleu de Roi)', '퐁파두르의 로즈(rose Pompadour)'라고 불리는 색의 유약을 입힌 자기를 생산했는데 이를 '세브르(Sèvres) 자기'라고 한다. 1756년의 일이다.


1. 네덜란드의 정물화 속 중국 청화백자(크락 양식)


Jacob van Hulsdonck(1582-1647), <Still life>, 1614, Oil on panel, 65.4×106cm, Bowes Museum, Durham


Willem Kalf, <Still life>, 17th century


2. 프랑스 베르사이유궁의 중국 청화백자와 세브르 자기


루이 14세의 청화백자, Madame Djahanguir Riahi Collection


<Pair of Vases>, c. 1778, h. 35.5cm, Sèvres, France, Walters Art Museum


영국은 이보다 조금 늦게 자기를 생산했다. 원래 영국은 미술사를 보면 섬나라라서 그런지 유럽 본토의 미술 전개보다 항상 한 템포 늦게 유행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영국에서 자기를 생산하고 유행하던 때는 이미 로코코 미술의 유행이 다 지나가고 신고전주의 미술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때였다.


18세기 후반, 신고전주의의 유행


잘 알려져있듯이 유럽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바로크, 로코코 미술의 유행이 끝나고 다시 고전을 전범으로 삼은 미술을 향유하게 된다. 르네상스 미술의 유행이 끝나고 처음으로 고전, 즉 그리스, 로마미술에 미의 지향점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위인 전기 쓰듯이 화가들에 대해 부정확하게 기술하고, 개별 미술작품들의 존재 자체에만 초점을 맞췄던 전근대적 미술사 서술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역사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미술작품들의 유기체적 흐름을 제시했던 요한 요아힘 빙켈만(1717-1767)이 활동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미술사학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기에 최초의 미술사학자라고도 평가받는 빙켈만은 유명한 저서 『회화와 조각에서 그리스 작품의 모방에 관한 고찰』(1755, 한국에서는 『그리스 미술 모방론』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있다.


우리가 위대하게 되는 길, 아니 가능하다면 모방적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고대인을 모방하는 것이다.

빙켈만은 이 책에서 이탈리아의 바로크, 프랑스의 로코코(당시 현대미술) 미술을 강하게 비판했다. 작품에 위대한 정신성, 성찰이 결여되어 있고 단순한 시각적 충격에만 집중하므로 저급하다고까지 평가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작품을 모방해야한다고 제시한 것이 이 책의 주된 주장이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을 기점으로 유럽에서는 그리스, 로마미술을 근간으로 하여 이상적인 비례, 엄숙한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신고전주의가 태동하게 되었다.


마침 같은 시기에 유럽에서는 폼페이 유적발굴을 비롯하여 그리스 유적발굴붐이 일기 시작했다. 전설로만 접해왔던 옛 그리스 미술을 대량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며 당시 미술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Portland Vase> by Wedgwood, c. 1790


영국의 도자기 역시 이같은 신고전주의 흐름에 맞춰 발전하였다. 웨지우드(Wedgwood)라는 브랜드로 유명한 영국 최고의 도자기는 영국인의 유별난 중국 홍차 사랑과 함께 인기리에 향유되었다. 당시 웨지우드 자기는 신고전주의의 시대답게 그리스 도기를 모티프로 삼은 기형과 조각을 본따 제작한 문양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스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시기의 도자기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웨지우드의 도자기가 워낙 개성있기 때문에 유럽의 도자기를 아는 이라면 한 눈에 영국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 정도이다.


<The Pegasus Vase> by Wedgwood, British Museum


<Jasper Ware>by Wedgwood, c. 1790, Cleveland Museum of Art


웨지우드 도자기 중에는 이같은 검은 색 바탕 외에도 '웨지우드 블루(Wedgwood Blue)'라고 부르는 부드러운 하늘색도 유명하지만 임팩트 면에서는 이게 훨씬 정체성을 드러내기에 좋다. 아마 영국 스타벅스는 머그잔을 통해 국가별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마케팅 정책(가령 일본 스타벅스가 4월이 되면 벚꽃 텀블러를 출시하듯이)에 맞춰서 이같은 미술사적 의미가 깊은 웨지우드 도자기를 모티프로 삼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같은 이야기를 어머니께 요약해서 들려드렸더니 너무 재밌게 들어주셨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이 미술사를 전공해서 학자로 성장해나가는 것 자체에 보람을 크게 느끼시는 편이라 더욱 좋아하신 것 같다. 나는 미술사 공부를 업으로 삼고 있는 데다가 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매일, 매시간 미술사를 항상 화두에 올려두고 있기 때문에 집에 와서도 미술사 이야기를 하는 것은 조금 힘에 부칠 때가 있다. 그래서 잘 안하게 되는데 어머니의 이런 소녀같은 모습을 볼 때마다 기분이 짠하기도 하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재밌는 이야기를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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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5

      • 우와 정말 책에서 볼 법한 훌륭한 포스팅 너무 감사합니다:)!! 현대에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물품의 면모를 예전의 회화작품과 도자작품들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니, 무심히 보며 지나칠 수 있는 양식 하나에도 수 많은 스토리가 숨어있는 이야기꾼인 미술사는 참 멋진 것 같아요 ㅠㅠ 감동받고갑니당ㅎㅎ

      • 미술사가 현재 문화의 근간이다보니 최고의 콘텐츠이긴 하죠. ㅎㅎ 재밌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일 봐요 ^^

      • 그럼 웨지우드가 영국 도자기역사의 시조가 된것이군요..그럼 유럽대륙의 신고전주의 도자기들은 어떤 형태로 발전한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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