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드 폴의 아직, 있다


예술이 가진 여러 기능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도움을 주는 것은 역시 위로일 것이다. 조형언어 혹은 멜로디로 그 어떤 표현을 한다고 해도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와닿아서 위로가 되어주는 것에 더 큰 감동을 느끼기 때문이다. 루시드 폴은 '음유시인'이라는 멋진 애칭으로 불리는 가수이다. 그의 노래가 시처럼 잔잔하면서도 곱씹을 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데서 비롯된 애칭이다.


기승전결이라는 감동의 기본 공식을 굳이 따르지 않아도, 그래서 폭발적인 클라이막스는 없을지라도 그의 음악은 감동을 자아내는 데 결코 부족하지 않다. 비가 애매하게 흩뿌려지는 날, 우산쓰기가 애매하여 그냥 걸어가다가 어느새 어깨가 비에 모두 젖었을 때와 같은 음악이 그의 스타일이다. 가사는 직선적으로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차분하게 읊조리는 것 같다. 이런 읊조림은 아무런 생각없이 들으면 어떤 감정인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잔잔하지만 1차원적으로 호소하는 것보다 더 큰 울림이 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른 이의 감정에 100% 공감할 수 없고, 위로를 건넬 때도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건넬 줄 아는 이기적인 존재이다. 예를 들어 실연을 당한 친구가 슬픔에 못이겨 매일같이 술을 마시자고 부르고 공감을 강요하다보면 결국 감정 과잉 상태에 이르게 되면서 짜증이 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위로를) 할 만큼 다 했어. 이제 슬픔을 처리하는 것은 너 자신의 몫이야'라듯이 말이다. 반면에 여러 정황상 이 친구가 분명 슬픔에 잠겨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혼자 조용히 감내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괜시리 더 측은해보이고 힘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이럴 때 담백하게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면 그 말에 담긴 힘은 더욱 커진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가끔씩 마음의 위로를 얻기 위해 음악을 찾을 때 폭이 커다란 '감동의 물결'보다는 '잔잔함'이 더 필요할 때가 있다. 그게 더 큰 위로가 될 때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루시드 폴의 음악은 듣는 이가 감정 과잉 상태에 이르게 만들지 않는다. 결코 일방적이지 않은 언어를 구사하는 음악가이다. 그렇다고 해서 난해할 정도로 함축적이지도 않다. 그저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차분하게 다 할 뿐이다. 하지만 그 방식이 고상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상당히 정제되어 있다. 그래서 감정 과잉 혹은 역류 상태에 이르지 않는다.


루시드 폴의 <아직, 있다>는 세월호 참사 속 희생자 학생들의 시각에서 쓴 곡이다. 이 곡은 아픔과 한을 직설적으로 발산하기보다는 오히려 담담하게 참사 속에서 구조될 수 있었던 친구들에게 역으로 위로를 건네고 있다. 그래서 더 슬프다. 그래서 더 큰 아픔으로 다가온다. 희생자, 학생들은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전혀 없다. 그런데도 살 수 있었던 생존자들에게 의연하게 위로를 건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프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응당 지녀야 할 미안함에 위로가 되어준다.


이 노래를 왜 이제서야 알게 되었을까. 오늘은 세월호 참사 701일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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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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