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리안' 전시 소개글 기고




신라호텔 회원들을 위한 잡지 노블리안에 전시 소개글을 기고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기고한 것은 아니고 박물관 큐레이터로서 현재 제가 몸 담고 있는 박물관 전시를 소개하는 글이지요. 이 일을 시작으로 앞으로는 다른 기관의 전시를 소개하는 글도 쓰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직업은 큐레이터이지만 이것은 직업일 뿐 저의 정체성은 미술사를 공부하고, 이를 글로 풀어내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앞으로도 열심히 공부하고 경력이 쌓이다보면 자연스레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래는 잡지에 게재된 글의 원고입니다. 학술적인 글보다 대중성에 초점을 맞추어 말랑말랑(?)한 프롤로그 성격의 글을 요구받은만큼 최대한 낭만적으로 썼습니다 :)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선과 면으로 이루어져있다. 따라서 선과 면이 없다면 이 세상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無’의 영역에 불과할 뿐이다. 사물을 재현하는 것에서 시작된 미술 역시 선과 면을 표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벽화나 우리나라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처럼 선사시대 사람들은 선과 면으로 물소, 고래 등을 그림으로써 의식주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그들의 열망을 표현하였다. 미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선과 면이라는 기본 조형 요소에서 시작된 미술의 역사는 동양과 서양, 각기 다른 시공간적 배경으로 인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수묵화는 글씨와 그림의 일치를 최고의 미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상정하였기 때문에 그림의 선은 곧 글씨의 선을 의미하는게 되었다. 이처럼 필선이라는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 ․ 서 ․ 화 일치’라는 동양 미학 최고의 찬사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도자기를 비롯한 공예 장르에서도 선과 면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여부에 따라 당시의 미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귀족들의 후원을 바탕으로 발전한 고려 청자는 형태와 문양 속에서 선들이 계획한 것 이상으로 넘치지 않도록 정성을 들여 제작하였다. 그래서 화려하면서도 감정의 폭을 제어할 줄 아는 고아한 귀족의 기품이 잘 드러난다. 반면에 백자 달항아리는 항아리의 윤곽선이 균형이 맞지 않아 일그러지고 표면에는 굽는 과정에서 생긴 작은 흠들도 보이며 불연소된 유약 때문에 색도 통일감이 없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점들이 자연에 대해 순응해 온 옛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며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서양은 오랜 시간동안 미술을 세상을 재현하는 도구로 여겨왔다.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비율을 갖고 있다고 본 인체를 재현했고, 투시도법이라는 기하학적 선을 기반으로 자연을 캔버스 위에 재현해왔다. 또한 현실적인 피부 표현을 위해 세밀한 붓으로 덧칠해나가는 명암법을 즐겨 사용했다. 그러나 서양의 미술은 완성된 자연의 재현이라는 대명제 아래 기본 요소인 선과 면을 철저히 숨기며 발전하였다. 이를 다시 세상에 꺼내어 보여준 것은 20세기 초에 활동한 피에트 몬드리안과 같은 추상주의 화가들이다. 20세기 초는 사진이 자연 재현의 도구로 유행하게 되면서 회화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 때이다. 이때 활동한 몬드리안은 회화만이 선사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며 점차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본질을 찾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수직선과 수평선, 그리고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만으로 구성된 몬드리안의 회화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몬드리안의 예술에서 색이 칠해진 면은 세상이고, 선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물 그 자체를 의미한다.


서양 문화가 하나의 기준이 되어버린 현재의 미술과 디자인은 몬드리안의 추상회화 등의 영향을 받아 다시 선과 면이라는 조형의 기본 요소에 주목하고 있다. 즉 장식성을 배제하고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생각이 현재의 트렌드가 된 것이다. 예술과 거리가 멀어보였던 IT 산업을 예술과 밀접한 영역으로 재배치한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Simple is the best". 다시 선과 면이 주목받는 시대가 왔다. 심플한 디자인은 선과 면이라는 조형의 기본 요소를 완성된 조형 속에 감추지 않고 본래 갖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강조함으로써 완성된다.


현재 전시 중인 조선시대 편병 역시 이러한 조형 원리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편평한 면과 면이 만나 도자기 표면에 선이 살아나고, 그 선은 다시 면과 만나면서 조화를 이룬다. 호림박물관은 이렇게 미술의 기본 조형 요소인 선과 면의 어울림을 감상할 수 있는 편병을 통해 관람객에게 색다른 디자인적 요소도 선보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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