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법고창신의 정신을 말하다.

추사의 천재성은 그의 평생에 많은 신비스런 전설을 남겨 놓지만 그의 출생에 붙여진 이야기만큼 거창한 것은 없다. 추사는 팔봉산의 정기를 타고났다고 한다. 어머니인 기계유씨가 추사를 잉태한지 24개월만에 그를 낳았는데 그가 출생하던날에 후정의 우물물이 줄어들고 팔봉산의 수목이 모두 시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사는 나면서부터 팔동산의 정기를 타고난 비범한 사람으로 주변의 촉망을 받았던 듯한데, 과연 그 정기설은 헛되지 않아서 아기 때부터 신동소리를 듣게된다.

 

그가 6세 되던 해에 입춘첩을 써서 서울 장동에 있던 경저인 월성위궁 대문에 붙인 일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북학의 기수인 정유 박제가가 지나다 이를 보고 깜짝 놀라서 일부러 그 아버지 유당 김노경을 찾아보고 '이 아이가 장차 학문과 예술로써 크게 세상에 이름날 것인데 내가 장차 잘 가르쳐 성공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한다.

 

그리고 그 다음해 7세 때에도 역시 춘서첩을 써서 다시 대문에 붙였는데 이번에는 좌의정을 지내는 73세의 노재상 번암 채제공이 월성위궁 문전에 자비를 멈추고 주인을 찾게 되었다. 그는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을 불러 '대문에 붙인 글씨는 누가 쓴 것이오'하고 묻는다. 김노경이 아들의 글씨라고 대답하자 채제공 말하기를 '이 아이가 반드시 명필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릴 터이나 만약 글씨를 잘 쓰면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하지마시오.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면 꼭 크게 귀하게 되라라.'라고 했다한다.

 

추사는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완원() 같은 이름난 유학자와 접할 수가 있었다. 이 시기의 연경 학계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렀었다. 미켈란젤로도 24살에 그의 역작 <피에타>상을 만들었으니 천재들에게 24살은 인생의 전환기라 말할 수 있겠다.

 

이후 추사는 연경에서 여러 명사들과 만나 사귀며 학연을 맺는데, 그 중에서도 그가 제일 먼저 찾아뵙기를 청한 것은 스승 박초정이 존경해 마지않던 옹방강이었다. 당시 연경학예계의 노대가로 금석학의 연구에 정심하여 독자적인 문호를 열고 있었다. 그는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금석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북한산순수비()를 발견하고 『예당금석과안록()』·「진흥이비고()」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연경()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진적(: 친필)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조맹부()·소동파()·안진경()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다시 더 소급하여 한()·위()시대의 여러 예서체()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하다)한 추사체()이다.

‘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
봉은사에 은거하던 71세 때 쓴 것으로 추정되는 행서대련
(춘풍대아능용물, 추수문장불염진·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하고, 가을물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학문과 벼슬에서 탄탄대로를 달리던 추사에게 닥친 최초의 좌절은 1830년에 그의 아버지 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배후조종혐의로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되면서 일어났다. 그 일 때문에 추사 자신도 일시 관직에서 밀려났으나 순조의 배려로 다시 복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인영, 권돈인과 삼두체제를 이룰 만큼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1840년에는 동지부사로서 꿈에도 그리던 연행에 다시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풍양 조씨의 득세에 다시 반격을 가한 안동 김씨가 10년 만에 윤상도 옥사를 다시 거론하여 이번에는 그 자신이 연행길은커녕 9년에 걸친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추사 개인으로서는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일이었지만 이 귀양으로 하여 우리가 오늘날 추사체라고 부르는 독특한 경지의 글씨가 완성되었으니 전화위복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그러나 추사는 단지 글씨에만 능했던 것은 아니다. 시화도 글씨에 못지 않았다. 시 역시 철저한 정도수련을 주장하여 옹방강으로부터 왕사정, 주이존을 거쳐 원호문, 우집에 이르고 다시 황정견과 소식에 까지 이르는 것을 시도의 정통으로 삼고 이들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정희, 고사소요, 지본수묵, 24.9 x 29.7cm, 간송미술관 소장

김정희, 적설만산, 지본수묵, 27 x 22.9 cm,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에 있어서는 그도의 문인 취미를 요구하여 서권기와 문자향을 제1로 치고 심의의 표출을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고담하고 간결한 필선으로 예서를 쓰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였으니, 특히 지금 전하고 있는 <세한도>나 <고사소요>, <지란병분>등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가 즐겨 그리되 가장 어렵게 생각한 것은 난초그림이었다.

 

그는 난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말하였다.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화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서화관은 가슴 속에 청고고아(: 맑고 고결하며 예스럽고 아담하다)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그는 학문의 세계에서나 예술의 경지에서 모두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독자적인 문호를 개척함으로써 학예양면의 당세종장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그의 학문과 예술은 천부의 재질을 바탕으로 하여 가장 정규적인 교육과 끊임없는 자기 수련의 과정 속에서 이룩된 것이었다. 따라서 섬뜩이는 천재성이 결여하기 쉬운 깊이나 범인이 수련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오성이 부족없이 구비되어 있었다. 

 

추사 김정희의 정수만을 선보인 간송미술관의 2014년 가을전시 추사정화 展을 맞이하여 추사 김정희의 생애와 예술관에 대해 알고자 이 글을 썼다. 도판은 간송미술관 추사정화 전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하여 실었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한다는 뜻의 '법고창신' 의 뜻을 본받아 행한다면 무엇을 공부하든간에 새로움을 배우는 기쁨이 솟아나리라 생각한다. 이 글이 그 기쁨을 깨우는 작은 파동이 되기를 바란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정희 [金正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추사 김정희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돌베개), <서화 9 추사정화> 도록, 간송문화재단, 2014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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