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그 영화와 그 사람이 떠오른다.

 

원래는 봄에 보면 좋을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 시작했으나, 써놓고 보니 이건 뭐...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 주가 되어 버렸네요. 그래도 쓴게 아쉬워 공개하니 너그러이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

 

1. 봄날은 간다.

 

 

2001년 군입대를 몇 주 앞둔 9월의 어느 날, <8월의 크리스마스> 감독의 새로운 영화가 개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내가 고등학생 때 나왔던 만큼 사실 큰 감흥은 없었지만 어쩐지 대학생이 된 지금이라면 그의 영화에 크게 젖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봉한지 얼마 안되어 당시 만나던 사람과 함께 <봄날은 간다>를 봤다. 영화 마지막에는 유지태가 갈대 밭 속에 서서 조용히 갈대 소리를 채집하는 장면이 나오며 끝이 나는데 그 때 알 수 없는 밋밋한 느낌이 들었다. 썩 재밌게 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순수한 유지태가 마냥 안타깝고, 경험 많은 이영애는 만나선 안 될 여자의 표상 같았다. 

 

그렇게 조용한 멜로 영화 한 편 봤다는 느낌으로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는 내 기억 속에서 점차 사그러져 갔고, 나는 입대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1년 후 <봄날은 간다>를 함께 봤던 그 사람은 군대라는게 세상 최고의 시련이라도 되는 양 행동했던 나의 철없음에 내 곁을 떠나갔고, 덕분에 나는 참 많이 힘들어 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덕분에 한 단계 성장할 수 있게 되어서 떠나준 것에 고맙지만 그 때는 그랬다.

 

내가 근무하던 부대 특성 상 나는 사회에 자주 나와 있었는데(공익도, 상근도 아닌 육군 현역이었음에도) 공허함에 많이 방황했었다. 그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는데 그 때 우연히 <봄날은 간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영화를 다시 봤고, 처음 봤을 때 이해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유지태는 순수했던게 아니라 순진했던 것이고, 이영애는 영악하고 나쁜 여자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여자였다는 점을 말이다. 

 

그 후로 <봄날은 간다>를 100번은 족히 넘게 봤던 것 같다. 지금은 당시처럼 자주 보지는 않지만, 봄이 되어 뭔가 가슴이 허한 싱숭생숭함이 느껴질테면 가끔씩 꺼내 보는데 눈을 감고 대사만 들어도 그 때 감정이 물씬 올라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어쩌면 처음 봤을 때 느낀 밋밋함은 이제 봄이면 느낄 수 있는 싱숭생숭함, 허무함의 초기 단계가 아니었을까.

 

2. <4월 이야기>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어학연수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일본으로 가는 것은 더더욱 낯설었다. 쉽게 표현하자면 '아웃 오브 안중' 같은 나라였다. 그리고 2학년이 되면서 어학연수를 간다는 사람들이 슬슬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미권으로 갈 뿐 일본으로 가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우상과도 같은 존재의 선배 누나가 한 명 있었다. '단과대 쓰리탑'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굉장한 미모를 자랑했는데 인기에 비해 구설수에는 단 한 번도 오르내리지 않는, 그런 프로페셔널한 이미지의 선배였다. 그리고 과 활동과는 거리가 먼 아웃사이더라는 점도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래봤자 21살인 한 학번 위의 선배였지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내게는 굉장히 큰 존재로 여겨졌다.

 

운이 좋게도 나는 선배와 아주 가깝게 지낼 수 있었고, 서로의 연애에 대해 조언을 해 줄 정도로 어쩌면 당시 여자친구 보다 속내와 고민을 더 쉽게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였던 것 같다. 너무 높아 보여서 남자로서 다가설 용기조차 안나던 그런 선배였다.

 

 

그렇게 나는 2학년이 되었고 1학기가 막 시작할 때 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나왔는데 그 선배에게 문자 한 통이 와있었다. 잠깐 과방에서 보자는. 무슨 일인가 싶어 신입생들 데리고 술 마시러 가자는 동기들을 먼저 보내고 쏜살같이 과방으로 달려갔는데 그 때 광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창을 등지고 과방 가운데 놓인 큰 테이블에 앉아있던 선배의 모습을 말이다. 봄 햇살이 화창하게 내리던 날씨였는데 덕분에 그 선배에게서 후광이 비치는 듯 했다. 그 자태에 내가 "엇" 하고 멈칫 거리자 선배는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소지으며 "왔어?" 라고 물어봐 주었고, 이내 용건을 꺼내기 시작하였다. 다음 달에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간다는 말을 건네면서.. 자세히는 아니지만 상당히 허탈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나는 일본이란 나라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선배는 그 일이 있기 전 겨울에 봤던 영화 <러브레터>와 함께 내게 일본이라는 키워드를 심어주고 떠났다. 일본에서 전화하기가 여의치 않으면 편지하자는 말을 남긴 채. 

 

 

일본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든 나는 수강 신청 정정을 통해 <일본 문화의 이해>라는 교양 과목을 수강하기 시작하였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별 다른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니 선배가 일본으로 떠난 후 참 무미건조한 나날을 지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문화의 이해> 수업에서 영화를 한 편 보게 되었는데 그 영화가 바로 <4월 이야기>였다. 러닝 타임이 고작 1시간 살짝 넘는 영화라 수업 시간에 끝까지 볼 수 있었다. <4월 이야기>는 무미건조한 영화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처음 도쿄로 유학 온 마츠 타카코의 일상이 나에겐 그 선배의 일상을 엿보는 듯 했고 오랜만에 연인이라도 만나듯 반가움이 교차하였다. 

 

영화 속에서 마츠 타카코는 마지막에 첫사랑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제외하고는 외로움을 기반으로 한 대학 생활 시작의 설레임을 안고 덤덤히 도쿄 생활을 준비해 나간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선배도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가끔씩 주고 받은 편지와 통화를 통해 선배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조성민과 최진실이 결혼한다더라, 일본에서는 정말 큰 이슈이다는 식의 지극히 사소한 대화 속에서 선배의 차분하기만 한 일상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배는 일본에서 1년, 영국에서 1년을 어학연수를 다녀왔고 나는 군대에 다녀왔다. 그리고 전역하자마자 어학연수를 다녀왔는데 <4월 이야기>와 함께 남아있는 그 선배에 대한 추억 덕분에 나 역시 일본으로 다녀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선배와는 꾸준히 연락을 하고 지냈다. 내가 자신의 영향을 받아 일본으로 연수를 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꽤 뿌듯해하던 선배의 표정이 생각난다.

 

미리 일본 문화를 알려주겠다며 그 때 내한한 아무로 나미에 콘서트도 데려갔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쉽지 않은 관계인데 내가 짝사랑하는 감정을 용케 잘 숨겨온 덕분인지, 아니면 선배가 알면서도 모른체 해준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7년을 신선함을 유지한 그런 관계로 지낼 수 있었다. 당연한 결말이지만 선배는 영국 연수 시절 누군가를 만났고,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서 우리 관계도 서서히 끝이 났다. 

 

암튼 감성에만 치우친 나날을 영위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린 요즘은 사실 지루하기만 한 <4월 이야기>를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4월 이야기>는 봄 특유의 설레임과 외로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영화로 아련하지만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3. <건축학개론> 

 

 

한국 영화가 <쉬리> 이후 르네상스기를 맞이 하면서 재밌는 영화들이 많이 나왔지만, 멜로 영화 만큼은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90년대 <접속>,<약속>, <8월의 크리스마스>, 2000년대 <봄날은 간다>를 마지막으로 딱히 기억나는 멜로 영화가 없다. 덕분에 이제는 멜로 영화가 개봉을 해도 보는 듯 마는 듯 하게 스쳐 지나 가게 되었다. 

 

그러던 2012년 봄, <건축학개론>이 엄청난 인기를 끄는 것을 보고 혼자 영화관에 가서 봤던 기억이 난다. 특히 엔딩 크래딧이 올라갈 때 흐르는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은 마치 콘서트장에 와있는 듯한 감동이 들었는데 그만큼 영화가 감동을 뒷받침 해 주었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이처럼 영화의 내용, 시대 배경, OST 삼박자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영화가 또 있을까.

 

잘 알려진대로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건축학개론>을 보면 남자는 첫사랑이 오버랩된다고 한다. 심지어 여자들에게 남자친구와 함께 봐선 안될 영화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나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했다. 내심 기대도 했던 것 같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앞에 두고 느낄 수 있는 가슴 먹먹함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던 차에 오랜만에 첫사랑에 대한 추억과 가슴 시림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의미였을까. 정작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사귀었던 사람은 생각나질 않고, 앞서 이야기 한 선배의 기억 만이 잔상처럼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오르는 것이었다. 당연히 잊고 있었던 017로 시작하는 선배의 휴대폰 번호도 떠올랐고, 멀티플렉스가 아니었던 당시 피카디리 영화관의 하얀 커버를 씌운 다소 딱딱한 의자에 앉아 이성재, 고소영 주연의 영화 <하루>를 함께 봤던 1학년 겨울 방학도 떠올랐다. 그리고 당시에 무한 리플레이를 걸어 놓고 들었던 이승환의 라이브 앨범 <무적전설>과 영화 <러브레터>의 감동이 물씬 올라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이 영화 덕분에 첫사랑이 꼭 사귀는 관계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어쩌면 첫사랑이란 사랑이 무엇인지를 처음 깨닫게 되는, 스무살이 되고 나서 가장 감성이 예민해지는 때 좋아했던 사람 혹은 그 시절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건축학개론> 속 승민과 서연이 서로 애틋한 감정을 가졌지만 끝내 사귀지 않았기에 그 사람이, 그 시절이 좋은 추억으로 남았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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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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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2

      • 영화와 사랑은 많이 닮은 것 같아요~영화 한편에 사랑 하나가 떠오르는...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이 글을 읽으니 봄기운이 물씬 느껴지네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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