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 김기창, 한국인의 시각으로 해석한 예수의 일생

 

<귀로>, 1992, 160.5×130cm

 

12월 연말이다. 시간은 언제나처럼 가고, 일은 똑같이 해야 하고, 만나는 사람들과 하는 이야기도 비슷한데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는 도시와 사람들은 다른 때에 비해 2배는 바빠져 있는 것 같다. 2000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때문에 '지구 종말이 오면 뭘 해야 할까'를 고민하며 친구들과 마지막 날에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나눴던 중1은 이제 정말 가만히 있으면 뒤쳐져서 지구 종말이 올 것 같은 두려움에 하루하루를 사는 이십대가 되어버렸다.

 

종종걸음으로 해야 할 일들만을 하다가 저녁이 되어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으면 힘이 있는 무언가를 찾게 된다. 예수, 성모마리아, 부처, 천지신명 등의 신적인 존재나 격이 급 떨어지지만 마초ㅋㅋ같은 남자라든지, 아니면 심지가 곧은 사람들, 소나무, 파도 같은 것들에 어떤 기적이나 한 순간의 어지러움을 다 토로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나 스스로가 부여잡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게 되고, 나 자신보다 강한 것을 탐구하며 가끔 거기에 기대려고 하기도 하고, 때론 너무 기대게 될까봐 스스로 거리를 두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종종 하다가 특히 연말이 되면 순두부 같아지는 나의 자아와 계획들과 감정들을 붙잡아 응고를 시켜줄 것들이 더욱 더 필요해지는데 그럴 때는 힘이 있는 그림을 보고 있으면 조금 힘이 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운보 김기창의 그림들 말이다.

 

<행렬>, 1992, 101×70cm


운보 김기창은 8살에 장티푸스로 심하게 아픈 후 귀가 멀게 되어 후천성 청각장애인이 된다. 그리고 김기창의 모친은 김기창을 이당 김은호의 밑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게 한다. 김기창은 2001년에 타계할 때까지 굉장히 많은 수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1946년 즈음에는 채색화를 중심으로 그림을 그렸고, 1950년대에는 성경 속 예수의 이야기를 우리식으로 해석하여 화폭에 남기기도 했다(☞ 운보미술관에서 <예수의 생애>을 하고 있다. 12월 31일까지이다).


그는 아름답건 추하건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운명, 그 적막한 세계로의 유배를 ‘하느님의 선택’으로 믿고, 예술을 통해 그 소외를 극복하고자 일생 불굴의 의지와 투혼의 열정을 사르게 된다. 이런 그의 치열한 삶과 예술적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30점으로 이루어진 그의 신앙화이다.

 

“그것은 마음 괴로운 순간이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어디에선가 비껴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그 빛줄기 아래에서 예수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하고 있었다. 통곡을 끝내고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나는 동굴이 아닌 햇빛이 눈부신 방에 앉아 화필을 들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깜빡 졸았고 졸다가 예수의 괴기한 꿈을 꾼 것이다”


운보의 이 고백에서 보듯이 그의 신앙화는 붓을 들고 그림에 열중하다가 잠시 조는 사이에 문득 수난의 예수를 현몽한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 권용준, 「운보 김기창의 신앙화 - 두루마기를 입은 예수」, 『경향잡지』 2006년 3월호.

 

<동방박사들의 경배>, 1952, 101×73.5cm

 

<사마리아의 여인>, 1952, 76×63cm

 

<수난당하다>, 1952, 76×65cm

 

<요한에게 세례받음>, 1952, 76×63cm


김기창은 1960년대는 추상화를 중심으로,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는 바보산수를 중심으로 그렸다. <바보산수>는 조선시대 후기의 민화적 기법과 사상을 현대화시킨 작업을 의미한다.


1976~1983, 바보 산수화로의 귀결

 

1.운보 민화적 발상의 산수

소박한 취향과 원생적인 감동을 판단으로 하면서, 이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다시 해석해 들어가는 독특한 조형에 지지되어 있다.

 

2.소재 및 필의

자연 근대적인 풍속을 주로 선택하며, 구도와 설채는 민화가 지니고 있는 자유로운 투시법과 강한 원색의 대비를 보여준다. 필의는 다분히 즉흥이며 내용은 해학적이다.

 

3.모티브 따른 구분

   1) 풍속적 - 이조사회의 한국인의 생활상 추구,(득위 묘법)

   2) 풍류적 - 산수중심 : 산수속에 인간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

                    인물중심 : 산수의 경계가 인물을 압도하는 경향

 

운보의 대표적인 회화세계를 여는 이 경향의 특징은 우선 시간과 공간의 자유를 들 수 있다. 화면 어디에서도 우리는 자유로운 형상의 변화와 일탈 된 느낌의 공간적인 해방을 맛보게 된다. 과감한 강조와 생략, 관념적인 운필과 대상들의 의외적인 도입, 파격적인 배치에서 이런 자유는 그가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이지적인 사고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형상에 구속되지 않으면서도 직관적인 일탈을 이루는 동양적인 도가나 불가사상을 근저로 하는 세계관을 새롭게 열어 보인 것이다.

 

☞ '운보예술', 운보문화재단 


<김장>, 1970

 

<설날>, 1970


그 후 1983년부터 10년간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아 은거, 은일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백두정상>, 1990, 53×45.5cm

 

<청산마을>, 1990, 121×63cm

 

<청산한일>, 1992, 101×70cm


한 자리에 계속 남아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안주의 끝일 수도 있다. 물론 내가 누운 전기장판이 따뜻해지면 일어나기도 싫은 것이 사람의 자연스러운 성격이지만, 전기장판의 뜨끈함을 박차고 일어나는 순간에 인간의 변화와 성장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정도 기간을 두며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는 김기창과 같은 작가를 보면 인생은 정말 변화무쌍하며 나 역시 현실에 안주하지 않아야겠다고 또 한 번 다짐하게 된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달이 뜨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운보 김기창의 힘 있는 그림들을 보며 아침에 뜨는 해가 매번 새롭도록 나를 단련시키고 싶다.



p.s. 운보 김기창의 작품 도판들은 국립예술자료원,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 사이트에서 가져왔다. 이 사이트들에는 굉장히 많은 작품들과 평론, 작가노트 등을 확인할 수 있으며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도 볼 수 있다(☞ 국립예술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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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4

      • 글이 진짜 좋아요 많은것을 돌아보게 합니다
        연말이네요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 감사합니다 !! 열심히 공부해서 더 좋은 글 올리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많이 받으시고, 청마의 기운에 따라 힘찬 한 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 오늘 우연히 들렸는데 지식이 상당하시네요

        저의 지적허영을 충족하고 갑니다. ㅎ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 자주 오겠습니다. ㅎ

      • 감사합니다. ㅎㅎ 필진들의 다양한 관심을 글로 표현할테니 앞으로도 자주 들러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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