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를 꿈꾸는 이들에게 - 대학원에서 인문학 공부를 한다는 것은



소위 인문학을 공부하는건 배고픈 길이라고 표현한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인문학에 대한 지원이 열악한 나라에서는 펀드를 조성하기도 힘들고, 공대생들처럼 프로젝트를 따와서 그 돈으로 생활하며 연구할 기회도 별로 없다. 미술사 역시 인문학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현실이다.

원래 학부 때 꿈이 뉴욕 맨하은(맨하튼으로 부르면 안된댄다)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는 광고쟁이였고, 그 꿈에 맞춰서 나름 열심히 준비한 적이 있다. 결국 원하던 곳에 취직하여 차근차근 광고쟁이로서 일을 하며 점점 담당하는 광고주가 대기업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또 축구를 워낙 좋아해서 더 어릴 때에는 영화 <제리 맥과이어> 같은 스포츠 에이전트를 꿈꾼 적도 있었기 때문에 광고 AE 경력을 살려서 우리나라 최고의 에이전트사에서 근무를 한 적도 있다.(그래봤자 스포츠 마케팅 시장이 협소한 우리나라이기에 별 볼 일 없었지만)

그러던 어느 날 인간적으로나, 업무적으로나 가장 존경했던 부장님과 점심 식사를 하는데 조만간 이 회사를 떠나 창업을 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회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할 나이인 40대 초반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맡고 있는 광고주도 소위 빵빵했고, 스펙도 좋으며, 인간성까지 좋아서 잘 하면 임원까지 가겠다고 여겼던 분에게서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동안 안보이던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 일의 특성 상 40대가 되면 자의 반, 타의 반 광고대행사를 떠나는 사실을 보게 된 것이었다. 잘 된 케이스라고 해봤자 자신이 맡아왔던 대기업 광고주 쪽 기획팀으로 가는 것이었고, 아니면 자신 만의 작은 광고대행사를 차린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렇게 세운 광고대행사의 90% 이상이 5년 내에 망한다는 것도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광고가 좋아도 내 인생을 이런 곳에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일하면서 느껴왔던 허무함까지. 나는 AE였는데 AE는 쉽게 말하면 기획자라고 보면 된다. 즉 광고를 따오기 위해 최고의 마케팅 전략을 세우는게 미덕인 일이었는데 그렇게 며칠 밤을 세워가며 일하고, PT를 해서 광고를 수주해 오고, 그 컨셉에 맞춰서 제작팀과 멋진 광고를 만들고 나면 그 즉시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조사했던 모든 것들이 트렌드가 지나 사장되는 일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다가 '무언가 계속 쌓아가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 쌓아가는 일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회사의 부속품이 안되며 할 수 있는건 공부 밖에 없다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공부는 미술사였다. 사표를 내던 날 지도교수님께 전화를 드려 딱 한 마디 말씀만 드렸던 기억이 난다.

"계속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나는 다음 해부터 미술사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공부를 시작한지 한 달만에 회사를 다니며 불었던 몸도 적정 몸무게로 돌아오고, 과로로 인해 심장쪽 근육이 뭉치는 증세와 역류성 식도염도 바로 사라졌다. 이를 두고 나는 공부가 체질이었다는 말로 해석하며 아주 행복하게 미술사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한 가지 간과했던 점은 그동안 받아왔던 연봉이 제로로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아직 20대였기 때문에 별로 고달픈 줄을 몰랐다. 선배들이 가져다 준 박물관 알바 등을 하며 최소한 내 생활비와 책 살 돈은 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0대가 되니 얘기가 달라지더라. 일단 씀씀이가 20대와는 달라졌던 것 같다.

한 동안 여자친구 만날 생각도 없이 공부에만 몰입했었다. 표면적으로는 논문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30대의 나이에 형편상 20대 초반 대학생 커플들의 연애 패턴을 가지고 누군가를 만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때에도 박물관에서 계속 일은 하고 있었는데 다들 알다시피 박봉이었고, 그나마 받은 월급도 외국에 답사가기에도 벅찼다. 일단 미술사 책이라는거 자체가 워낙 비싸서 책, 제본 값도 많이 나갔고 말이다.

그래도 그 기간동안 자괴감이 들지 않고, 아주 행복하게 미술사 공부를 해올 수 있었던 것은 미술사라는 학문 자체에 대한 애정도 있었지만 그보단 회사 생활을 하며 조금 더 많은 연봉을 받는거 자체가 나의 행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왔기 때문이었다.

김난도 교수님 강연을 듣고 써주신 어머니의 메모


그리고 가장 큰 힘이 되었던 이유는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한데, 어머니가 늘상 해주신 말씀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부터 공부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셨다. 그래서인지 틈 날 때마다 이런 말씀을 해주시고, 도와주셨다.

"2, 30대 때 돈이 없는 것보다 4, 50대가 되어서 돈이 없는게 훨씬 비참하다."

생각해보니 2, 30대 때 돈이 없어 힘들다라고 느낄 상황은 많지 않다. 여러가지 케이스가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말하자면 친구들과 술 마실 때 "야. 여긴 내가 쏠께." 이러지 못하는 수준 정도?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나에게 힘이 되었던 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어디선가 접한 책의 글귀였다.

"전문가가 되기 위해선 최소한 10,000시간 동안 공부해야 한다."

요즘 20대를 괴롭히고, 잔소리만 하는 자기계발서가 하도 난무해서 거들떠 보지도 않지만 이 말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10,000시간을 연수로 환산하면 10년 정도 되는데 우리 사회가 정말 그러하기 때문이다. 최소 10년 정도의 경력 혹은 연구기간이 있어야 전문가로 대우해주는 것을 말이다.

조금 고달퍼도 10년 동안 공부해서 회사의 부속품이 아닌 '나'라는 이름을 내걸고 전문가로 행복하게 살 것이냐, 아니면 지금 몇 푼의 연봉을 받으며 '나'가 없이 회사의 부속품으로서 살며 언제 태풍에 휘말릴지 모르는 삶을 살 것이냐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20대이다 하더라도 그 연봉은 정말 많은 것이지만 내가 몇 푼의 돈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래봤자 회사 1년~5년차의 연봉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아무리 능력을 인정받더라도 어느 순간 훅 가버릴 수도 있는게 바로 회사 생활이라는 것을 나는 광고대행사에서 접했기 때문에 부질없는 것에 대한 생각도 강하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머리 속에 새겨두고 있다.

"내 머리 속에 있는건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이 점을 절실하게 믿고 있기에 공부하는 삶에 정당성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큐레이터로 사는 삶은 자리잡기도 어렵고, 자리를 잡는다 할지라도 그 대우가 썩 좋진 못하다. 그렇기에 내 선, 후배들은 누가 미술사 공부하고 싶다, 진로를 바꿔서 큐레이터가 되고 싶다고 하면 도시락 싸들고 다닐 기세로 말리곤 한다. 사실 이게 현명한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가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어하고, 상담을 해주는 이유는 지금까지 위에서 나열한 생각 덕분이다. 비록 자신의 형편이 어렵고, 모험을 거는 것 같은 불안함이 있을지라도 자신이 가장 행복한게 무엇인지, 그리고 10년 후에 자신의 모습이 어땠으면 좋을지를 꿈꾸며 현실에 꿈을 덮는 후회스러운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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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뜨

Curator, Art History, Exhibition, Museum, Gallery, Book, Station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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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12

      • 아르뜨님~공감하고 또 응원합니다! 꿈과 행복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의 롤모델이 되어주셔서 감사하구요 ^^

      •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이렇게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광화문에서 차라도 한 잔 했으면 좋겠습니다. ^^

      • 비밀댓글입니다

      •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주위 분들이 반대하시는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분들의 말씀도 귀 기울일 필요는 없으니 절충안 혹은 확고한 의지를 담은 비전을 가지고 설득하면 분명 힘이 되어주실거에요. 꿈 없이 쳇바퀴 도는 듯한 삶을 사는 것보단 힘들어도 하고 싶은 것을 찾아나가는게 더 행복한 것일테니 힘내시구요. ^^

      • 비밀댓글입니다

      • 주원씨 요즘 많이 힘드셨구나! 본업도 열심히 하면서 나름 계획성있게 알아보고 실천하는 모습 보기 좋아요. 최악의 경우의 수까지 계획에 넣어서 꼭 원하는 방향으로 가시길 바래요. ^^

      • 비밀댓글입니다

      • 세희씨,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지난 주까지 같이 스터디 했는데요. ㅎㅎ
        항상 스터디 끝나고 빨리 자리를 뜨셔서 아쉬웠어요. 종종 안부 전해주시고 조만간 얘기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

      • 계속 공부 대학원 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했다가 우연히 들어온 블로그에서..
        아주 좋은 글을 마주했네요.

        용기가 부럽습니다.

      • 저도 광고홍보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는 학부생입니다. 광고쪽에서 일하셨다니 반갑네요ㅎㅎ 광고홍보학이 정말 재밌는 학문이라고 생각되기는한데 그 가치에 대해서 고민이 많이 되는 요즘입니다 ㅎ 저도 미학공부를 좋아해서 공부를 오래하고 싶은데 .. 고민스럽네요 ㅠㅠ

        아르뜨님 부럽습니다! 응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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